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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날로그의 맛

아날로그 매체와 체험의 감각을 돌아보는 글.

넋두리 2026–03 표지
넋두리 2026–03 표지

오래된 청바지가 웃돈을 얹어 판매된다. 보존이 잘된 오래된 것들이 가치 있게 여겨진다. 우리는 그것에 '빈티지'라는 이름을 붙인다. 최근 개봉한 영화 <오디세이>는 아이맥스관이라는 특수 상영관에서 매진 행렬을 이어가고 있다. 10대와 20대 사이에서는 2000년대에 만들어진 디지털카메라를 구할 수 없다고 한다. 일종의 기현상처럼 보인다. 그런데 정말 그럴까? 모바일의 세계는 너무나 편리하다. 셔터 한 번으로 많은 것을 담아낼 수 있고, 또 표현할 수 있다. 더구나 AI가 등장하면서 많은 이미지를 직접 만들어낼 수 있게 되었다. 가능하지 않았던 일들을 가상의 이미지로 구현하고, 매끄러운 시각 이미지들을 마구 생산한다. 우리에게 필요한 많은 것들이 손가락 터치 몇 번으로 구현된다. 그런데 왜, 다시 아날로그와 빈티지가 소환되고 있을까. 왜 일부러 새것을 낡게 만들어 과거로, 어제로 시간을 돌려버릴까. 우리는 무엇이 필요하기에 다시 지나간 질감을 만지고 싶어할까.

영화 <오디세이>는 전체를 아이맥스 카메라로 촬영했다. 아이맥스 카메라는 디지털 카메라가 아니다. 필름을 사용하기에 필름통이 카메라에 부착되며, 필름은 통상적으로 4:3 비율을 지닌다. 영상 매체가 처음 등장했을 때의 비율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 셈이다. 모바일 환경의 화면으로 대표되는 16:9 비율은 와이드하고 광활하다. 가로로 긴 비율이기에 장대한 풍경과 화려한 묘사가 가능하고, 이야기 전개에도 탁월하다. 그러나 이 비율이 효율적으로 많은 정보를 담을 수 있고 모바일 환경과 유사해 영화관의 비율을 스마트폰에 이식할 수는 있지만, 인간의 시야각과는 다르다. 카메라 렌즈로 비교하자면 16:9는 광각 렌즈에 가깝고, 인간의 시선과 가장 유사한 화각은 50mm 표준 렌즈다. 영화·비디오 매체도 마찬가지여서, 그 화각에 더 가까운 쪽은 오히려 4:3 비율이다. 아이맥스는 단지 과거 필름이 주는 아날로그적 향수를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지닌 눈의 체험과 유사한 비율로 간접 체험을 극대화하는 매체인 것이다. 그렇게 아이맥스는 오히려 설득력을 얻었다 — 지금의 모바일 환경이 지니지 못한 체험을 가능하게 하는 비율과, 실사 촬영을 기반으로 한 정교한 그래픽 작업이 맞물려, 아이맥스관에 암표를 만들어낼 만큼 강력한 경험의 욕구를 낳은 것이다. 최근 뉴스 미디어를 살펴보면, 영화 예매율이 늘어난 상당 부분이 체험관을 비롯한 특별관에서 나온다. 의자가 흔들리고 바람이 나오는 4DX관, 16:9를 넘어 양옆의 시야까지 장악하는 스크린X관까지 — 관객을 다시 영화관으로 소환하는 것은 일반관이 아닌 특별관이다.

이 압도적인 체험에 대한 갈증은 상영관의 형태에만 머물지 않는다. 스크린에 담기는 이미지 자체의 만듦새로도 옮겨간다. 얼마 전 대중들의 엇갈린 평가로 이슈가 되었던 <호프>의 경우를 볼 필요가 있다. 좋은 영화인가 아닌가를 떠나, 거의 모든 평론가와 관객에게 호평을 받은 부분은 바로 미술이었다. 초토화된 호프 마을의 거대하고 디테일한 묘사는 극찬을 받았다. 부서진 마을의 파괴된 모습, 여기저기 피가 낭자하고 스크린 밖까지 이어질 듯한 두려움이 묻어난 공간이다. 본래 있던 유사한 공간을 재현하는 것보다, 그것이 파괴되거나 전혀 다른 모습으로 변모한 상태를 묘사하는 것은 훨씬 어렵다. 그에 상응하는 리서치가 필요하고, 파괴된 공간의 개연성을 묘사하는 데에도 밀도가 갖춰져야 한다. 영화 <호프>에 대한 평가를 차치하더라도, 이 파괴된 공간이 주는 영화적 체험은 가히 대단하다.

이러한 현상은 비단 영화관에 국한되지 않는다. 문화 전반을 살펴보아도 고전 문학, 오래된 가구, 21세기 이전의 복식 등 수많은 카테고리와 장르에서 지난 것들을 다시 소환하고 있다. 이것을 단순히 소비의 흐름이 반복되는 자연스러운 현상으로만 볼 수는 없다. 앞서 언급했던 것처럼, 그 사이에는 분명 모바일이라는 지금 우리의 눈과 귀와 촉감을 사로잡는 자극적인 콘텐츠의 상자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 자극은 오감을 무뎌지게 한다. 사물을 만지는 것이 아니라, 시각적 착시로 뒤덮인 것을 구현하는 유리를 만지게 한다. 냄새와 맛은 없다. 콘텐츠에서 발생한 체험을 관찰하는 우리의 눈은 점차 느낌과 감각의 현존과 멀어진다. 물론 이것의 이점도 분명하다. 바로 연결의 가속성이다. 애초에 모바일이라는 연결의 기계에 많은 것들이 이식된 것은, 보다 빨리 먼 거리에서도 연결이 가능하기를 바라는 욕구 때문이었다. 만날 수 없던 이들과 대면할 수 있고, 목소리를 실시간으로 나눌 수 있는 편리한 도구. 하지만 이 대화와 소통의 도구를 넘어서는 방대한 콘텐츠의 유통은, 우리를 대화의 장소가 아니라 '1인 미디어'라는 강력한 울타리 안에 우리의 오감을 묶어놓았다.

지금까지 살펴본 이유만으로 이 아날로그의 소환을 하나의 확실한 관점에서 설명하는 것은 비약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체험과 경험이 다시 소환되고 있는 지금, 이 현상에 어떤 질문을 던질 것인가가 매우 중요한 지점이라는 사실이다. 전시장에서 할 수 있는 체험과 온라인상에 노출되는 홍보물 사이의 간극, 그리고 관객이라는 1인칭 시점이 관람 후에 생산하는 후기 이미지들과의 간극은, 우리가 이미지를 어떻게 유통하고 어떠한 감각과 체험을 다시 소환하고 싶은지에 대한 갈망을 엿볼 수 있는 중요한 단서가 된다. 차후에 유통되고 뿌려지는, 재생산되는 이미지들(홍보물을 비롯한 다양한 형태의)은 이미 한 번 소비된 체험을 다시 납작한 이미지로 눌러 담는 과정이다. 우리는 그 이미지를 보며 또 다른 갈증을 느낀다 — 직접 만지고 싶다는, 그 실재를 두 눈으로 확인하고 싶다는 갈증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갈증을 부추기는 것 역시 다시 스크린이다. 화면 속의 화면, 이미지 속의 이미지가 끝없이 이어지며 우리를 실재의 결핍 앞에 데려다 놓는다.

그러므로 아날로그의 소환은 단순한 복고 취향이 아니라, 결핍에 대한 반응이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손끝에 닿는 질감, 필름이 담아내는 빛의 입자, 부서진 마을을 실제로 쌓아 올린 세트의 무게 — 이런 것들은 복제되지 않는 단 한 번의 현존을 증명한다. 편리함이 지워버린 감각의 자리에, 우리는 다시 낡은 것을 세워두고 있는 것이다. 그렇기에 질문은 이렇게 바뀌어야 한다. 우리가 그리워하는 것은 지나간 과거에 있을까, 아니면 지금 여기에는 없는 어떤 현존의 감각인가. 답은 아마, 후자에 가까울 것이다. 그렇다면 오래된 청바지에 웃돈이 붙고, 필름으로 찍은 영화에 암표가 따라붙는 일도 더 이상 기이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그것은 지나가는 복고 유행이 아니라, 디지털이 정교해질수록 오히려 짙어지는 결핍의 그림자에 가깝다. 매끄러운 화면이 지워버린 것은 다름 아닌 시간의 질감이었고, 우리는 그 질감을 되찾기 위해 낡은 사물의 표면을 자꾸만 더듬고 있는 셈이다. 편리함이 우리에게 준 것은 속도였지만, 그 속도가 대신 가져간 것은 손끝의 감각이었다. 그러므로 아날로그의 맛이란 결국, 우리가 무엇을 잃어버렸는지를 끊임없이 되묻는 미각이다. 이 갈증이 우리를 어디로 데려갈지는, 아직 알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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