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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y, My, 세기말

세기말 대중문화의 비극적 서사와 미디어가 만들어낸 감정을 돌아보는 글.

넋두리 2026–05 표지
넋두리 2026–05 표지

세기말, 2000년을 전후하던 시절의 한국 발라드는 유독 비극적인 서사를 사랑했다. 단순한 이별을 넘어 연인이 세상을 떠나는 설정이 흔했다. 밀레니엄을 앞둔 세기말적 불안감이 대중문화 전반에 스며든 탓이었을까? 신승훈의 ‘나보다 조금 더 높은 곳에 네가 있을 뿐’이라는 곡만 보아도, 제목에서부터 연인의 부재와 죽음을 암시한다. 감수성이 풍부했던 어린 시절의 나는, 인생의 깊은 고난이나 상실을 채 겪기도 전이었음에도 이런 비극적인 멜로디와 가사에 이끌려 용돈을 쥐고 음반 매장으로 달려가곤 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알 수 없는 노릇이지만, 어떤 면에서 이 가사들이 가진 장점은 명확했다. 죽음이라는 장치를 통해 사랑의 절절함을 극대화했고, 현실에서 겪어보지 못한 감정의 파도를 대리 경험하는 묘한 카타르시스를 안겨주었기 때문이다. 나의 학창 시절은 이처럼 짙은 감성의 대중문화와 함께 흘러갔다. 초등학교 6학년 무렵부터 유난히 음악 듣는 것에 푹 빠졌는데, 그 시기는 H.O.T., S.E.S., 핑클 등 1세대 아이돌이 활약하던 때와 겹친다. 하교 후 문구점에 들러 아이돌의 사진을 구경하고 수집하는 것은 하루의 큰 즐거움 중 하나였다. 특히 핑클의 엽서를 정성스레 모았던 기억은 지금 떠올려도 조금은 부끄러운 단상 중에 하나다.

이러한 세기말적 감성은 당시 안방극장을 차지했던 드라마들과도 맞닿아 있었다. 불치병에 걸린 여주인공, 엇갈린 운명 속에서 절규하는 남주인공 등 브라운관 역시 비극적이고 운명적인 사랑 이야기로 가득했다. 드라마의 서사는 죽음마저 불사하는 발라드 OST와 짝을 이루며 눈물샘을 자극했고, 다음 날 학교에 가면 친구들과 전날 밤 방영된 드라마 이야기로 꽃을 피우느라 여념이 없었다. 그러나 이런 이야기들 속에 어떠한 프레임과 관성들이 있었던 것도 분명하다. 연애관 안에서의 남자와 여자의 구분, 가령 여자 주인공은 가난하고 역경을 딛고 일어서는 캔디형 캐릭터가 많았고, 남자 주인공들은 소위 실장님이라 불리는 사회적 지위를 누리는 인물로 묘사되곤 했다. 드라마의 제목만 바뀔 뿐 대부분의 연애 드라마에서 스토리 라인은 거의 바뀌지 않았다. 미디어가 생산하는 획일화와 불평등의 구조들이 반복적으로 만들어지던 시기이기도 하다. 시청률 10%가 넘어가면 기적이라고 생각되는 오늘과 다르게 이때의 텔레비전 미디어는 수십 프로가 넘는 시청률을 기록하는 프로그램도 왕왕 있었다.

데이터가 아닌, 소수의 방송 매체가 대중의 취향과 가치관을 주조하던 시대였다. 취향을 세밀하게 분석하는 알고리즘이 부재했던 탓에, 브라운관이 쏟아내는 단일한 이야기 구조에 자연스레 익숙해졌다. 가난하지만 씩씩한 여성과 모든 것을 다 갖춘 백마 탄 왕자님이라는 판타지, 그리고 비극적인 죽음을 미화하고 소비하는 서사들은 당시 내 연애관이나 삶의 태도에도 조용히 스며들었다. 나에게 있어 2000년대 전후의 시절은, 미디어가 보여주는 이미지에 쉽게 마음을 내어주었던 시기였던 것 같다. 같은 노래에 울고 같은 드라마에 열광했던 그 몰입감은 시대가 요구한 감정일 수도 있지만, 어쩌면 다양한 선택지의 부재가 한몫을 했던 것도 같다. 세기말의 아날로그적 감성이라 부르는 그 시절의 몰입은, 돌아보면 낡고 정형화된 프레임을 그대로 수용하게 만든 결과이기도 하다. 주어지는 서사 외에 다른 선택지가 많지 않았던 그때, 미디어가 만들어낸 환상에 큰 의문을 품지 않은 채 고개 끄덕였던 것은 어쩌면 그 시절 내가 겪어내야 했던 자연스러운 과정이었을까. 오랜 시간이 흘러 다시 세기말의 가사를 소환해 질문을 던지게 되는 것은, 결국 기댈 곳이 필요했던 시절의 불안함, 그리고 그 시간대가 만들어낸 또 다른 그림자를 이제야 가만히 마주하게 되었기 때문이 아닐까.

신승훈 5집 앨범 이미지
신승훈 5집 앨범 이미지
《TV가이드》 1996년 5월호 중
《TV가이드》 1996년 5월호 중
조성모 3집 타이틀 〈아시나요〉 뮤직비디오 장면
조성모 3집 타이틀 〈아시나요〉 뮤직비디오 장면
드라마 〈토마토〉, 1999년 방영. 김희선·김석훈 주연.
드라마 〈토마토〉, 1999년 방영. 김희선·김석훈 주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