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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SEARCH

역사 안에서의 공포: 누락된 이름에 접촉하는 이미지

1. 역사의 행간, 그리고 낙인

역사가 거대한 기념비적 서사로 기록될 때, 그 이면에는 필연적으로 억압된 주체들의 파편화된 기록이 가라앉는다. 역사의 진보와 국가 중심의 담론이 추진력을 얻을 때마다 보편성이라는 명분 아래 개별적 삶의 서사는 공적 영역에서 소거되거나 무참히 파편화되어 왔다. 대체로 역사적 사건은 승리자의 전유물이나 국가 정체성을 공고히 하기 위한 통계적 수치로 환원된다. 이 견고한 기록 체계 내에서 정작 지워지는 것은 그 시대를 관통했던 구체적인 개인의 실존과 이름이다. 기념비가 수직으로 높이 솟아오를수록 그 배후의 그림자는 깊어지며, 권력에 의해 의도적으로 누락된 주체들은 바로 그 어둠 속에 유령처럼 머물게 된다.

한국의 근현대사를 서술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여러 비극적 사건들이 있다. 특히 5·18 민주화운동은 근대사에 대한 반성과 다양한 시사점을 던지는 매우 중요한 전환점이다. 최근 시민사회와 관련 기관의 노력으로 광주 민주광장에 옛 전남도청 건물이 복원되어 민주평화기념관으로 개관했다. 자칫 사라질 뻔했던 가까운 과거의 아픔과 고통의 장소가 다시 소환된 것이다.

5.18 광주민주화 기념관_옛전남도청
5.18 광주민주화 기념관_옛전남도청
5.18 광주민주화 기념관_옛전남도청

이 건물에는 다양한 방식의 애도가 자리한다. 그날의 참상과 기억을 담은 목소리가 생생하게 구현되고, 목놓아 부르던 민중가요를 들을 수 있는 공간이 마련되어 있으며, 어두운 지하에는 수많은 목숨을 앗아간 총기들이 무덤처럼 쌓여 있다. 이곳은 역사의 고통을 먼 과거의 일로 치부하지 않는다. 아직 끝나지 않은 애도를 다시금 이끌어내는 진혼곡이자, 죽은 자와 산 자가 다시 만날 수 있는 광장으로 열린 것이다.

5.18 광주민주화 기념관_옛전남도청 내부에 설치된 영상
5.18 광주민주화 기념관_옛전남도청 내부에 설치된 영상

서울에도 이와 유사한 비극적 공간이 있다. 바로 건축가 김수근이 설계한 남영동 대공분실이다. 희생자들을 기리고 애도하는 공간으로 거듭난 옛 전남도청과 달리, 이곳은 애초부터 누군가에게 극심한 고통과 두려움을 주입하기 위해 치밀하게 설계된 폭력의 공간이다. 현재의 대공분실은 이러한 잔혹한 흔적을 삭제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노출한다. 눈이 가려진 채 끌려온 수감자는 자신의 위치나 시간의 흐름조차 인지할 수 없는 상태로 강압적인 취조와 끔찍한 고문을 겪어야 했다. 극심한 고통 속에서도 자해조차 할 수 없도록 푹신한 흡음재로 마감된 벽은, 죽음마저 스스로 선택할 수 없게 만든 치밀한 억압의 장치였다. 이곳에 들어서는 순간, 우리는 감금되었던 억울한 이들의 공포를 생생하게 체험하게 되며, 당시의 고통과 슬픔은 오늘날 우리에게 가장 잔인하고 서늘한 감각으로 되살아난다.

남영동 대공분실 내부사진
남영동 대공분실 내부사진
남영동 대공분실 내부사진

나는 이러한 역사의 선택적 배제와 기록의 폭력성에 주목하여, 시각 예술이 누락된 존재들을 어떻게 소환하고 있는지 살펴보고자 한다. 예술은 때때로 공식 역사가 채택하지 않은 미시적 흔적들을 발굴하여 공적 담론의 장으로 끌어올리는 대안적 기록소의 역할을 수행한다. 기록되지 못한 자들의 고통과 비명을 예술적 언어로 치환하는 것은 과거를 복원하는 차원을 넘어, 현재의 역사 기술 방식에 대한 윤리적 재고를 요청하는 실천이기도 하다.

먼저 이러한 맥락과 교차하는 특정 비엔날레를 예시로 들어, 오늘날 이 보이지 않는 공포가 어떻게 잔존하고 있는지 살펴본다. 전시의 기획 구조를 분석하는 데 그치지 않고, 여러 작가가 참여하는 대규모 프로젝트가 근현대 및 식민 역사 속에서 누락된 사건과 산재한 공포를 어떤 방식으로 드러내며, 현재에도 유효한 질문을 어떻게 촉발하는지 돌아보는 과정의 초안이 될 것이다. 연장선상에서, 국내 작가들의 작업을 통해 한국의 역사적 궤적을 반성하고, 이미지가 단순한 기록을 넘어 애도와 성찰의 차원에서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고 해석되어야 하는지 소개할 예정이다. 역사적 매개자로서 작가가 점유하는 위치를 고찰함으로써, 시대의 흐름 속에 누락된 이름들이 예술을 통해 어떻게 현재적 의미를 획득하는지 규명하고자 한다. 나아가 현대 미술이 역사의 공백을 메우는 대안적 서사로서 지니는 가능성을 짚어보고, 새로운 윤리적 질문을 던지고자 한다.

역사의 행간에 누락된 장면들과 미술의 역학을 본격적으로 살피기에 앞서, 공포라는 현상과 그에 따른 인간의 반응을 먼저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공포는 외부의 위협으로부터 생명을 보호하기 위해 가동되는 가장 강력하고 본능적인 생존 시스템이다. 우리 신경계가 위험을 감지하는 순간, 신체는 즉각적인 비상 체제에 돌입한다. 주변 상황을 기민하게 파악하기 위해 동공이 확장되고, 당장이라도 뛰어오를 수 있도록 온몸의 근육이 팽팽하게 긴장한다. 동시에 당장 생존에 필수적이지 않은 소화나 타액 분비 등의 기능이 일시적으로 멈추며 입안이 바싹 마르고 식은땀이 흐른다. 이러한 투쟁과 도피의 반응은 현대 사회에서도 여전히 우리를 지켜주는 원시적이고 강력한 방어 기제다.

주목할 지점은 이러한 생물학적 방어 기제가 현대 사회의 정치적 맥락 속에서 교묘한 은유로 치환된다는 사실이다. 평범한 개인이 거대한 역사의 수레바퀴와 대면할 때 느끼는 감정은 경외감보다는 오히려 공포에 가깝다. 거대 서사에 언제든 짓눌릴 수 있다는 불안, 특히 특정 지역이나 이데올로기의 프레임에 갇혀 불온한 존재로 낙인 찍힐 수 있다는 두려움은 본능적인 회피를 유발한다. 한국의 현대사처럼 거대한 국가 폭력이 지역과 사상을 엮어 사회적 죽음을 선고했던 맥락에서, 타인의 비극이 나의 현실로 전이될 수 있다는 공포는 그 어느 때보다 실체적이다. 여기서 회피는 단순한 외면이 아니라, 개인에게는 심리적 방어 기제로, 권력에게는 정교한 사회적 통제 기제로 작동한다.

신체가 위협 앞에서 근육을 굳히고 감각을 곤두세우듯, 사회적 자아 역시 거대한 고통 앞에서 견고한 심리적 성벽을 쌓아 올리는 것이다. 이러한 방어 기제가 사회·역사적 차원에서 발현될 때 나타나는 가장 폭력적인 결과가 바로 개별성의 소거다. 이데올로기와 지역성이라는 붉은 낙인이 내게도 옮겨 붙을 수 있다는 실존적 공포는, 그 비극의 주체들이 나와 같이 고유한 서사와 이름을 가진 인간이라는 사실을 의도적으로 부인하게 만든다. 그들의 구체적인 고통에 공감하고 연대하는 일조차 사상적 불온함으로 간주되어 연좌제의 굴레를 쓸 수 있기에, 살아남기 위한 지독한 자기 검열이 작동하는 것이다. 감당할 수 없는 두려움으로부터 스스로를 안전하게 격리하기 위해, 우리는 무의식적으로 고통받는 자들의 구체적인 삶을 잘라내고 익명의 덩어리로 뭉뚱그리는 누락의 과정에 동조하고 만다. 권력과 시스템은 피지배층의 고통을 날 것 그대로 노출하여 직관적인 공포를 조장하기보다는, 이를 통계나 시스템, 정제된 정보라는 추상적 언어로 치환하곤 한다. 참상의 현장과 폭력의 희생자들은 사망자 수라는 건조한 데이터로 둔갑하며 개별성을 상실한다. 이를 통해 대중은 타자의 고통으로부터 안전한 심리적 거리감을 유지하게 된다. 낙인의 전염을 두려워하던 대중은 이 추상화된 수치 앞에서 비로소 안도하며, 타자의 고통을 성찰의 대상이 아닌 관조적인 스펙터클로 소비하게 된다. 이는 우리가 비극에 책임감을 느끼거나 연대할 가능성을 차단한다. 우리는 사건에 대한 정보를 아는 것만으로 윤리적 의무를 다했다고 착각하지만, 실상 그들에게 씌워진 낙인의 위협에 진심으로 닿지 않기 위해 지식이라는 견고한 성벽 뒤로 숨어버린 것일지도 모른다. 생존을 위해 입안을 마르게 하고 감각을 마비시키는 신체의 반응처럼, 우리 사회 역시 개별성의 소거를 통해 타인의 고통을 관찰 가능한 데이터로 격리함으로써 거대 서사가 뿜어내는 낙인의 공포로부터 스스로를 방어하고 있는 것이다.

2. 배제하는 사진

수잔 손택(Susan Sontag)은 자신의 저서 『타인의 고통』1을 통해 현대인이 이미지를 소비하는 방식이 어떻게 타자의 고통을 스펙터클로 전락시키는지 경고한 바 있다. 특히 그는 “사진을 찍는다는 것은 구도를 잡는 것이며, 구도를 잡는다는 것은 무언가를 배제한다는 것”이라며 프레임이 지닌 폭력성을 지적했다. 카메라가 발명된 이래로 사진은 죽음을 길동무 삼아, 렌즈 앞에 놓인 대상의 흔적을 포착함으로써 현실을 증명하는 객관적이고 권위 있는 매체로 자리 잡았다.

그러나 사진은 고통의 현장을 중계하면서도, 동시에 관찰자와 피사체 사이에 넘을 수 없는 유리벽을 설치한다. 전 세계의 종군 기자들이 참상의 현장으로 깊숙이 침투해 파괴와 살해의 장면을 중계하고 우리는 그것을 바라보지만, 철저히 정제된 인터페이스를 통과한 비극의 이미지는 우리에게 무감각을 동반한다. 우리는 고통에 '접속(Access)'할 뿐, 그것이 우리의 피부에 '접촉(Contact)'하는 것은 허용하지 않는 것이다. 시각은 오감 중 가장 거리를 두기 용이한 감각이기에, 망막은 멀리서도 대상을 포착하면서도 그 대상이 지닌 온도를 직접 체감하지는 못한다. 이러한 신체성의 결여는 역사를 박제된 기억으로 만들고, "심하게 손상된 육체가 담긴 사진들은 흔히 아시아나 아프리카에서 찍힌 것"이라는 손택의 비판처럼, 타인의 고통을 연대와 공감의 대상이 아닌 관찰과 관음의 스펙터클로 소비하게 만든다. 그렇다면 사진의 시대에 우리는 어떻게 타자의 고통에 진정으로 가닿을 수 있을까. 예술의 존재 이유는 바로 이 안전한 '접속'의 연쇄를 끊고 '접촉'의 사건을 창출하는 데 있다.

알프레도 자르(Alfredo Jaar)2가 1994년 르완다 대학살을 다루며 보여준 작업들은 이러한 예술적 실천의 적절한 예증이다. 자르는 르완다의 참혹한 현장3과 수많은 시신을 촬영했지만, <리얼 픽처스(Real Pictures)>(1995)에서 그 사진들을 관객에게 보여주지 않는다. 대신 사진을 검은 리넨 상자 안에 봉인하고, 상자 겉면에 사진 속 참상을 건조한 텍스트로만 기록해 두었다. 관객은 잔혹한 이미지를 스펙터클로 소비하는 시각적 접속을 원천적으로 차단당하는 대신, 그 상자들의 물리적인 부피와 무게를 공간에서 대면하며 상상력을 통해 타인의 고통과 접촉하게 된다. 또한 <구테테 에메리타의 눈(The Eyes of Gutete Emerita)>(1996)에서 그는 학살을 목격한 여성의 사연을 텍스트로 읽게 한 뒤, 엄청난 수의 슬라이드 마운트가 쌓인 빛나는 테이블을 제시한다. 관객이 허리를 숙여 루페(돋보기)를 통해 작은 슬라이드들을 들여다보면, 그곳에는 참혹한 시체 대신 오직 그녀의 '두 눈'만이 반복적으로 나타난다. 고통받는 육체를 전시하는 재현주의적 태도에서 벗어나, 고통을 목격한 증인의 눈과 관객의 시선을 물리적으로 얽히게 함으로써 방관자적 안전거리를 붕괴시킨 것이다.

알프레도 자르, Real Pictures (1995). 출처:Musée cantonal des Beaux-Arts
알프레도 자르, Real Pictures (1995). 출처:Musée cantonal des Beaux-Arts

이처럼 접촉은 철저히 물리적이다. 그것은 나의 피부와 타자의 피부가 맞닿는 사건이며, 그 과정에서 발생하는 불편함과 온도 차를 감내하는 행위다. 미술은 단순히 비극의 장면을 재현하는 데 머무는 것이 아니라, 자르의 작업처럼 비극이 내포했던 물리적 저항감을 관객의 신체에 전이시키기도 한다. 특권을 누리는 우리의 좌표와 고통받는 그들의 좌표가 연결되어 있음을 자각하고, 망막에 맺히는 상을 넘어 내부를 타격하며 피부를 자극하는 촉각적 경험으로서의 미술. 그것이 바로 비극 앞에 침묵하지 않기 위한 예술의 '발굴'이다.

알프레도 자르, The Eyes of Gutete Emerita (1996). 출처: Hood Museum - Dartmouth
알프레도 자르, The Eyes of Gutete Emerita (1996). 출처: Hood Museum - Dartmouth

사례 하나 — 시간과 장소의 교차로 드러나는 보이지 않는 공포

박찬경이 기획한 제8회 서울미디어시티비엔날레 《귀신 간첩 할머니》 (2014)4는 서구 중심적인 기술만능주의가 가져온 근대성을 전면적으로 재고하며, 식민과 냉전 시기 동안 억압되고 오역된 시간들을 다시 번역하고자 시도했다는 점에서 과거를 사유하는 방식의 전환점을 제시했다. 특히 ‘귀신, 간첩, 할머니’라는 세 가지 키워드를 통해 거대 서사가 소외시킨 아시아의 트라우마와 기억의 문제를 ‘미디어(매개체)’의 관점에서 영리하게 풀어내었기에, 이번 글에서 근대성의 폭력과 인간의 고통을 추적하는 핵심 사례로 이 비엔날레를 주목하고자 했다.

누락된 영혼으로서의 '귀신', 냉전과 식민의 공간에서 발현된 '간첩', 그리고 고통의 역사를 구술하고 소환하는 증인으로서의 '할머니'는 전시 공간 속에서 유동하며 교차한다. 여기에는 거대한 기념비적 역사가 들어설 자리가 없다. 대신 오늘날까지 유전되는 불안과 공포의 감각을 근대의 장면들과 병치함으로써 장소, 시간, 인간을 하나의 차원 안에서 조우하게 한다.

특히, 전시의 수많은 참여 작가 중 요네다 토모코(Yoneda Tomoko)와 피셔 & 마로안 엘사니(Fisher & El Sani)의 작업에 내포된 장소와 시간의 교차에 관해 언급하고자 한다. 두 작가의 작업은 2011년 후쿠시마 원전 사고라는 구체적인 파국을 공유하면서도, 이를 과거의 역사적 사건(히로시마 원폭 및 냉전기 핵 공포)과 시각적·서사적으로 교차시키는 방법론을 보여주고 있다. 이는 동일한 장소에 내포된 다른시간의 교차지점, 시간을 타고흐르는 보이지 않는 공포에 대한 발굴이다. 요네다가 장소의 기억이라는 정적인 아카이브를 통해 보이지 않는 공포를 추적한다면, 피셔 & 엘사니는 생존자들의 구술과 워크숍이라는 동적인 실천을 통해 고통을 표면화 한다. 이 두 가지 태도의 교차는 《귀신 간첩 할머니》가 도달하고자 했던 상처받은 기억의 예술적 번역을 가장 명징하게 재현하는 대목이라고도 할 수 있다.

요네다 토모코(Yoneda Tomoko)5는 두 개의 참사를 시각적으로 교차시킨다. 〈적운〉 시리즈는 얼핏 평화로운 일상의 풍경을 포착한 듯 보이지만, 촬영 날짜와 장소를 확인하는 순간 관객은 전혀 다른 진실과 대면하게 된다. 캡션에 명시된 2011년은 후쿠시마 원전 사고의 해이며, 여름 하늘의 뭉게구름(적운)은 1945년 히로시마의 버섯구름을 필연적으로 환기한다. 작가는 보편적인 풍경 사진을 매개로 일본 제국주의의 비극(원폭)과 근대화의 폭력적 결과물(원전 사고)이라는 두 개의 역사적 트라우마를 중첩한다. 여기서 '귀신'은 근대성이 은폐하고 억압한 상처받은 기억이자, 방사능이라는 보이지 않는 치명적 공포로 형상화된다.

연구 자료 15쪽 도판 1

함께 출품된 피셔와 마로안 엘사니(Fisher & El Sani)6의 〈공포 속에 산다-3·11 이후〉는 구로사와 아키라의 1955년작 영화를 현재의 재난과 대조시킨다. 과거 냉전기의 핵 공포를 다룬 허구적 서사가 후쿠시마 피난민들의 실제적 고통과 거울처럼 마주 보게 함으로써, 근대 기술 만능주의가 초래한 비극이 과거완료형이 아닌 반복되는 현재진행형임을 폭로한다. 피난민들이 자신의 공포와 상실을 직접 발화하는 워크숍 과정은 억눌린 상처를 집단적으로 대면하는 현대적 '해원(解冤)'의 제의와도 같다. 박찬경 감독이 '귀신'을 통해 공식 역사에서 억압된 상처를 은유했듯, 이 작품에서 방사능은 냄새도 형태도 없지만 사람들의 삶을 철저히 파괴하고 배회하는 '가장 현대적이고 치명적인 유령'으로 작동된다. 작가들은 피난민과 현지 주민, 배우들이 영화 상영 후 벌이는 토론과 즉흥 연기(워크숍)를 다큐멘터리로 담아내고 있다. 참여자들은 방사능이라는 보이지 않는 위협 앞에서 느끼는 무력감, 고향을 잃은 상실감, 사회적 고립에 대한 불안을 자신의 몸과 입을 통해 직접 말한다. 보이지 않는 체제적 폭력이 '산 자들의 신체'를 매개로 가시화되고 있는 것이다.

연구 자료 16쪽 도판 1

사례 둘 — 누락과 발굴

세바스티앙 살가두(Sebastião Salgado)7의 《노동자들(Workers)》 시리즈는 데이터화된 인간을 다시 '물리적 신체를 가진 존재'로 복원한다. 브라질 세라 펠라다 금광의 노동자들을 포착한 그의 카메라는 철저히 신체적이다. 살가두는 관찰자의 시선을 넘어 그들과 생을 공유하며 고통을 체득했다. 사진의 거친 입자는 시각을 넘어 촉각적 저항감을 발산하며, 진흙과 땀방울은 관객의 망막을 긁으며 고통스러운 접촉을 요구한다. 이는 노동자의 신체에 새겨진 역사의 마찰력을 보존하려는 시도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이 숭고하고 압도적인 화면 속에서 그들의 '이름'은 누락된다. 수잔 손택의 지적처럼, 살가두의 사진은 고통의 감각을 생생하게 복원해 낸 대가로 구체적인 개인을 익명의 '보편적 노동자'로 환원시킨다. 땀방울과 근육의 스펙터클에 압도된 관람자는 그들이 처한 구체적인 비극의 맥락 대신, 타인의 고통이 빚어낸 미학적 숭고함만을 소비하게 되는 윤리적 딜레마에 직면한다. 그의 작업에서는 끊임 없이 고통 받고 있는 노동자들의 이름이 누락되어 있다.

연구 자료 18쪽 도판 1

이러한 지점에서 노순택의 《망각기계》연작8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 작업은 광주 5·18 구 묘역에 방치된 영정사진들을 통해 기억의 풍화 과정을 기록했다. 인화지라는 물리적 사물은 세월과 습기 속에 부패하고 곰팡이가 피어오르며 형체를 잃어간다. 그러나 작가는 이 훼손된 이미지에서 역설적으로 기억의 생생한 '피부'를 발견한다. 여기서 사진이라는 매체는 눈앞의 참상을 새로이 '찍어내는' 재현의 도구로 작동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은 지나간 시간의 지층 속에 방치되어 있던 사진의 물질적 생애와, 그 허물어짐의 의미를 '발굴'해 내는 고고학적 행위에 가깝다. 대상을 박제하는 대신, 이미 박제된 기억이 시간 속에서 어떻게 스스로 무너져 내리는지를 응시하는 것이다. 정보로서의 이미지는 늙지 않지만, 사물로서의 사진은 생명체처럼 부패한다. 이 부패한 표면은 효율적인 역사 기록이 지워버린 '오류'이자, 우리가 직면해야 할 '애도의 불가능성'을 시각화하며 매끈한 역사 표면 아래 잠몰된 부채감을 소환한다.

노순택, 망각기계1 / 망월동 옛묘역에서 발견한 사진들 (출처: 노순택 작가 홈페이지)
노순택, 망각기계1 / 망월동 옛묘역에서 발견한 사진들 (출처: 노순택 작가 홈페이지)

3. 행간을 채우는 실천으로서의 미술

역사의 기념비적 서사에서 누락된 이름들을 복원하는 것은 단순한 아카이브의 확장을 넘어선 윤리적 실천의 영역에 해당한다. 현대 사회의 시스템은 수많은 고통을 정제된 데이터로 변환하여 매끄러운 인터페이스 위로 흐르게 함으로써 주체의 실존적 고통을 소외시킨다. 이러한 '매끄러움'은 비극을 구경거리로 전락시키고 타자의 고통에 대한 면역력을 강화할 뿐이다. 따라서 동시대 미술이 지닌 가능성은 이 매끄러운 표면에 균열을 내고, 추상화된 존재들에게 다시금 물리적인 '피부'를 재생하여 환원하는 것에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제8회 서울미디어시티비엔날레 《귀신 간첩 할머니》에서 기획자 박찬경이 의도했듯, 인지의 저편으로 퇴각한 사실들을 다시 살려내는 '예술적 번역'은 대안적 역사를 서술하는 강력한 매개(미디어)로 작동한다. 특히 이 전시에 참여한 요네다 토모코의 작업은 동일한 장소를 교차하는 시간의 병치를 통해 눈에 보이지 않는 역사의 공포를 가시화한다. 단지 평화로워 보이는 하늘일 뿐인 〈적운〉 시리즈는 사진이 지닌 본질적인 모호성을 역이용하여, 관객으로 하여금 그동안 가려져 있던 '망각의 시선'을 다시 보게 만든다. 히로시마와 후쿠시마라는 서로 다른 시기의 참사가 하나의 장소적 풍경 안에서 중첩될 때, 사진은 박제된 기록을 넘어 현재 눈앞에 실재하는 치명적 공포(방사능)의 증거가 된다. 이러한 장소와 시간의 교차는 피셔 & 마로안 엘사니의 작업에서 재난 생존자들의 구체적인 목소리 및 몸짓과 조우하며, 거대 서사가 지워버린 개인의 구체적인 통증을 더욱 극적으로 되살려낸 수단이 된다.

이처럼 추상화된 통증에 물리적 경험을 부여하려는 시도는, 글의 초반에 수잔 손택의 이론과 더불어 살펴본 알프레도 자르(Alfredo Jaar)의 작업과도 긴밀히 공명한다. 자르가 선보인 이미지의 부재와 침묵은 역설적으로 미디어가 매끄럽게 덮어버린 거대 비극의 심연을 가장 강력하게 증언하는 윤리적 장치다. 이러한 시각적 절제와 침묵은 사진이라는 매체의 '물질성'을 사유하는 지점으로 한 단계 더 확장된다. 살가두가 고통받는 신체를 압도적인 화면으로 환원시켜 구체적인 개인들을 이름 없는 '보편적 노동자'로 증발시켰다면, 노순택이 응시한 부패하는 인화지의 표면은 완전한 재현을 포기함으로써 사진의 또 다른 연약한 가능성을 열어젖힌다. 여기서 사진은 단순히 대상을 완벽하게 재현해 내는 창작자의 매끄러운 예술품이 아니다. 세월의 흐름에 따라 물리적으로 마모되고 소멸해 가는 인화지의 표면 그 자체는, 그동안 오류와 누락을 매끄럽게 제거하며 질주해 온 근대성 체제에 대한 반성과 다름없다. 바래고 찢겨나가는 이미지의 가녀린 유약함은 역설적으로 역사의 가속 속에서 우리가 누락한 부서진 실존을 대변한다.

효율과 속도를 추구하는 매끈한 근대의 체제는 누락과 오류를 끊임없이 제거하려 하지만, 인간 삶의 진실은 늘 그 배제된 틈새와 허물어지는 표면 위에 존재해 왔다. 타인의 고통과 역사의 참상으로부터 눈을 돌리는 일은 결코 안전한 도피처가 될 수 없으며, 오히려 주체를 깊은 존재론적 고립에 빠뜨린다. 이번 글에서 다룬 작업들은 관람자를 망각의 궤도에서 이탈시켜 참혹한 사건의 밀도 앞에 멈춰 세우고, 불편하지만 필연적인 마찰을 감각하게 만든다. 이 촉각의 마주침은 우리가 타인의 고통에 여전히 통각을 느끼는 존재임을 증명하며, 이름 없이 스러져간 이들과의 깊은 연대를 가능케 한다. 여기서 미술은 주류 역사에 편입되지 못한 자들을 기리는 대안적 아카이브이자, 현재를 사는 우리가 망자에게 건네는 가장 끈질긴 애도의 방식이 된다. 이 마찰과 애도의 접점에서 비로소 역사의 흉터는 가시화되고, 우리는 타자의 고통에 기꺼이 응답할 수 있는 윤리적 주체성을 회복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