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oho Park박소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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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간전시공간으로 호명될 수밖에 없을까

전시공간을 운영하며 마주하는 질문들. 대안공간, 신생공간, 민간전시공간이라는 이름과 공간의 정체성을 생각하는 글.

넋두리 2026–01 표지
넋두리 2026–01 표지

학부 1학년, 동양화 전공 묘법 수업 시간이었다. 정확히 몇 학기였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교수님께서는 학생들에게 명함을 하나씩 나눠주셨다. 명함에 적힌 이름은 '사루비아 다방'. 대안공간이라는 개념조차 몰랐던 새내기 시절이자 미술계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전혀 알지 못했던 입문자였기에, 나는 교수님이 카페를 오픈하신 줄로만 알았다. 실제로 몇몇 동기들도 그렇게 수군거렸으니 말이다. 우리의 이런 반응을 예상이라도 하신 듯, 교수님은 대안공간의 개념과 사루비아 다방에 대해 간략히 소개해주셨다. 그리고 덧붙이셨다. 나중에 훌륭하게 자라서 이곳에서 전시를 열며 다시 만나자고.

그로부터 20여 년이라는 제법 긴 시간이 흘렀다. 아이러니하게도 지금의 나는 전시 공간 '의식주'를 운영하고 있다. 공간을 운영하다 보니 대표, 디렉터, 기획자 등 나를 부르는 호칭도 참 다양해졌다. 종종 대중들은 우리 공간을 '대안공간'이나 '신생공간', 아주 간혹 '갤러리'라 부르기도 한다. 하지만 동종업계인 예술계 종사자들 사이에서는 대안공간보다는 주로 신생공간으로 불리는 편이다. 사실 어느 것도 이 공간을 명확히 맞아떨어지게 부르는 호칭은 아니다. 이쯤에서 너무나도 자명한 사실 하나를 짚고 넘어가려 한다. 바로 '대안공간'에 대한 개념이다. 대안공간은 1990년대 후반에 나름의 뚜렷한 미션을 띠고 만들어진 개념으로, 당시 이들을 호명할 때는 아주 명확한 기준이 존재했다. 1999년, 홍대 인근에서 대안공간 루프가 문을 열었고, 같은 해 대안공간 풀과 프로젝트 스페이스 사루비아 다방이 잇달아 등장했다. 이들이 1세대 대안공간으로 불리게 된 데에는 분명한 이유가 있었다. 경직된 주류 미술계에 맞서 실험적인 형식과 진보적인 내용을 실어 나르는 것, 그것이 대안공간이 스스로에게 부여한 역할이었다. 여기서 진보적이라 함은 그동안 사회가 애써 감추고 억눌러 온 주제들을 표면 위로 끌어올리는 작업을 뜻했다. 구조적으로도 대안공간의 지향점은 명확했다. 제도권 밖에서 성장한 신진 작가들과 실험적인 작업을 지지하고 지원하는 것. 이는 이미 자리 잡은 주류 양식을 받아들여 기성 작가의 작품을 사고파는 상업 갤러리의 존재 이유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것이었다.

분명한 역사와 목적을 가진 대안공간이라는 이름과 지금의 공간들을 향한 다양한 호명들 사이에서, 과거 교수님이 건네주셨던 그 명함 한 장의 무게가 새삼 다르게 다가온다. 2010년 무렵, 학부를 졸업하던 그 시기에 스마트폰이 널리 퍼지면서, 모바일 환경이 급속도로 확장되었다. 더불어, 싸이월드의 시대가 저물었다. 페이스북, 트위터, 그리고 후발주자인 인스타그램에서는 많은 것들이 이식되었다. 시각예술의 정보 또한 이곳에서 많은 변곡점을 만들어내기 시작했다. 신생공간이라 불렸던 바로 그 공간들도 이와 함께 등장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이것은 하나의 현상이었다. 적어도 나에겐 그랬다. 제도권 밖이라 여겨지는 곳에서 깃발을 꽂고 그들 나름의 자생 방법을 모색했던 공간들. 물론, 10여 년 동안 운영된 곳이 있음에도 이것을 현상이라 부를 수밖에 없는 이유는 바로 형태와 시스템에 있다. 대안공간은 비록 제도권 바깥에서 출발했다 하더라도, 나름의 조직 체계를 갖추고 있었다. 디렉터가 있었고, 운영위원회나 자문단이 있었고, 어떤 곳은 공공기금이나 후원구조와 연결되어 있었다. 무엇보다 이들은 스스로를 무엇이라 부를지에 대한 합의가 있었다. '대안공간'이라는 이름 자체가 이미 하나의 선언이었고, 그 선언 아래 전시 기획과 담론 생산이 지속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는 최소한의 틀이 마련되어 있었다.

반면 신생공간은 애초에 이름조차 스스로 지은 것이 아니었다. '신생공간'이라는 용어는 그 공간들을 운영하던 이들이 자처한 이름이 아니라, 이들을 관찰하고 기록하려던 평론가와 기획자들이 사후적으로 붙인 명칭에 가깝다. 공간을 열었던 청년 작가들은 대체로 자신의 작업실 한켠이나 반지하, 옥탑, 상가 건물의 자투리 공간을 빌려 전시를 열었을 뿐, 어떤 운동이나 선언을 의도하지는 않았다. 그들에게는 조직도, 미션 선언문도, 지속가능성에 대한 청사진도 없었다. 있었던 건 오히려 절박함과 즉흥성이었다. 대관료를 감당할 수 없어서, 혹은 기성 화랑의 큐레이팅 방식에 낄 자리가 없어서, 그들은 자기들끼리 공간을 만들고 전시를 열고 SNS에 사진 몇 장을 올렸다. 그리고 그 사진들이 인스타그램의 타임라인을 타고 퍼지면서, 흩어져 있던 개별 공간들이 하나의 흐름처럼 보이기 시작했다.

여기서 신생공간이 '현상'으로밖에 인지될 수 없었던 이유가 드러난다. 대안공간이 하나의 제도적 실체였다면, 신생공간은 애초에 실체라기보다 동시다발적인 사건들의 집합이었다. 비슷한 시기, 비슷한 세대의 작가들이, 비슷한 경제적 조건 속에서, 비슷한 플랫폼(SNS)을 통해 자신의 활동을 노출시켰기에 마치 하나의 흐름처럼 읽혔을 뿐, 이들 사이에 공유된 강령이나 지속적인 연대체는 존재하지 않았다. 공간은 열렸다가 반년, 길어야 2~3년 안에 문을 닫는 경우가 대부분이었고, 문을 닫는 이유도 제각각이었다. 임대료를 감당하지 못해서, 운영자가 작업에 집중하기 위해서, 혹은 애초에 '공간을 계속 운영한다'는 개념 자체가 그들의 목표가 아니었기 때문에. 그러니 이것을 하나의 운동으로 이름 붙이기엔 너무 헐거웠고, 그저 스쳐 지나가는 유행으로 치부하기엔 그 파급력이 무시할 수 없을 만큼 컸다. 그 애매한 자리에 '현상'이라는 말이 놓였다.

이 지점에서 대안공간과 신생공간의 차이는 단순히 세대 차이나 규모의 차이로 환원되지 않는다. 대안공간이 '무엇에 반하여(against)' 존재했다면, 신생공간은 '무엇도 없이(without)' 존재했다. 대안공간은 주류 미술 제도라는 뚜렷한 대타항이 있었기에 저항과 대안이라는 정체성을 가질 수 있었지만, 신생공간의 운영자들에게 기성 제도는 저항의 대상이라기보다 애초에 진입 자체가 불가능한, 닿을 수 없는 영역이었다. 저항할 대상과 싸우는 것과, 애초에 그 싸움의 링 위에 올라갈 자격조차 주어지지 않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다. 그래서 신생공간에는 대안공간이 지녔던 선명한 미션 대신, 각자도생의 생존기가 남았다.

그리고 나는, 이 두 개의 이름 이후 어디쯤에서 '의식주'를 운영하고 있다. 대안공간이 갖췄던 조직적 체계도, 신생공간 특유의 즉흥적 휘발성도 온전히 나의 것이라 할 수는 없다. 누군가는 우리를 신생공간이라 부르고, 누군가는 대안공간이라 부르고, 또 누군가는 그저 갤러리라 부른다. 그런데 최근 들어 종종 마주치는 또 하나의 이름이 있다. '민간전시공간'. 국가나 지자체의 지원을 받는 공공 전시장과 구분하기 위해, 행정적 편의를 위해 붙여진 이 용어 앞에서 나는 잠시 멈칫하게 된다. 이 이름에는 저항도, 실험도, 세대적 절박함도 담겨 있지 않다. 그저 '민간이 운영하는 전시 공간'이라는 가장 건조하고 기능적인 정의만 남아 있을 뿐이다.

어쩌면 우리는 대안공간의 정치성도, 신생공간의 현상학적 열기도 지나버린 자리에서, 그 어떤 서사도 갖지 못한 채 행정 용어로 호명되는 시대에 들어선 것은 아닐까. 이름이 사라진다는 것은 단지 명칭의 문제가 아니다. 그 이름이 품고 있던 시대적 물음과 존재의 이유까지 함께 휘발된다는 뜻이다. 명함 한 장을 받아 들고 카페인 줄 알았던 스무 살의 나와, 이제 '민간전시공간'이라는 이름 앞에서 머뭇거리는 지금의 나 사이에는, 그렇게 이름을 잃어가는 공간들의 역사가 조용히 쌓여가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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