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자와 독자와 독자: 저자에 관한 질문으로부터
하나의 작품을 읽을 때 우리는 종종 그것을 만든 사람에게로 돌아간다. 작가는 어떤 삶을 살았는지, 무엇을 경험했고 어떤 의도로 이 장면을 만들었는지 묻는다. 그런 질문들은 작품에 다가가는 길을 열어주지만, 작가의 말만으로 작품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설명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같은 작품 앞에서도 누군가는 자신의 기억을 떠올리고, 누군가는 이전에 보지 못했던 관계를 발견한다. 작품이 다른 사람에게 닿는 순간, 그 의미는 만들어진 자리에서 조금씩 움직이기 시작한다.
이 글은 그 움직임 속에서 저자와 독자의 관계를 다시 살펴본 연구발제이다. 롤랑 바르트의 「저자의 죽음」과 「작품에서 텍스트로」, 미셸 푸코의 「저자란 무엇인가」를 함께 읽으며, 쓰는 사람과 읽는 사람 사이에서 의미가 어떻게 생겨나고 누구의 이름으로 인정되는지를 질문했다. 작가와 관객, 비평가와 기획자를 각각 ‘쓰는 독자’, ‘읽는 독자’, ‘구성하는 독자’로 바라볼 수 있을까.
쓰는 사람 곁에 읽는 사람을 놓기
저자라는 말에는 이미 읽는 사람의 자리가 들어 있다. 무언가를 쓴다는 것은 아직 만나지 못한 누군가에게 읽힐 형식을 만드는 일이다. 독자는 그 형식을 마주하며 자신의 경험을 겹쳐놓고, 그 안에서 읽을 수 있는 것과 쉽게 읽히지 않는 것을 발견한다. 쓰는 사람과 읽는 사람을 함께 놓고 보면, 작품의 의미가 어디에서 만들어지는지에 관한 질문도 조금씩 달라진다.
저자라는 말이 가리키는 범위도 언어에 따라 조금씩 다르다. 한국어에서 주로 책을 쓴 사람을 뜻하는 ‘저자’는 영어의 author, 프랑스어의 auteur로 옮겨가며 무언가를 처음 만들거나 어떤 행위의 기원과 책임을 지닌 사람까지 아우른다. 저자를 글쓴이로 이해하는 것과 작품을 시작하고 책임지는 존재로 이해하는 것 사이에는 차이가 있다. 직접 제작하는 사람과 자신의 이름으로 작품을 제시하는 사람이 반드시 같지 않은 오늘날, 그 차이는 저자의 자리를 다시 살피게 한다.
텍스트 역시 종이에 적힌 문장만을 가리키지는 않는다. 프랑스어 texte와 영어 text의 어원에는 직물과 짜임의 의미가 담겨 있다. 바르트는 이 짜임에서 여러 언어와 문화가 얽히는 관계를 읽어낸다. 그의 논의를 따라가다 보면 작품을 읽는 일은 그 안에 담긴 메시지를 알아내는 데서 한 걸음 더 나아간다. 어떤 말과 이미지가 만나고, 그 사이로 누구의 기억과 관습이 지나가는지 더듬는 일이 된다.
저자의 목소리에서 텍스트의 여러 목소리로
바르트는 「저자의 죽음」에서 발자크의 소설 속 한 문장을 가져와 누가 이 말을 하고 있는지 묻는다. 등장인물의 목소리일까, 작가 자신의 생각일까, 아니면 당대에 통용되던 문학적 관념일까. 한 문장 안에 여러 목소리가 겹쳐 있어 그 출처를 한 사람에게 돌리기 어렵다. 이 장면에서 글쓰기는 개인의 내면을 옮기는 행위를 넘어, 이미 존재하던 언어와 문화가 만나며 말의 기원이 흐려지는 자리로 나타난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작품의 의미를 만든 사람에게서 찾으려 했을까. 바르트는 개인의 인격을 중심에 놓은 근대의 저자 개념과, 작품을 작가의 삶과 의도로 설명해 온 비평의 관습을 문제 삼는다. 작가의 생애를 알면 작품도 이해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 속에서, 읽기는 종종 작품 뒤에 숨은 한 사람을 찾아가는 일이 되었다. 「저자의 죽음」이 되묻는 것은 그 사람의 존재보다, 그의 말이 해석의 끝이 되는 방식이다.
이러한 질문에 앞서 언어와 글쓰기의 주체를 다시 생각한 시도들이 있었다. 말라르메는 개인의 내면보다 언어의 작용에 주목했고, 발레리와 프루스트는 작가의 삶과 작품이 곧바로 이어진다는 믿음을 흔들었다. 초현실주의의 자동기술과 집단적 글쓰기는 개인의 의식적인 통제에서 벗어나 쓰는 일을 시도했다. 언어학 역시 발화를 한 사람의 목소리로만 설명하기 어렵다는 점을 드러냈다. 서로 다른 이 시도들 사이에서, 작품이 한 사람에게서 시작되어 그 사람으로 모두 설명될 수 있다는 생각은 점차 느슨해졌다.
바르트의 ‘쓰는 이’도 작품에 앞서 모든 의미를 품고 있는 존재는 아니다. 쓰는 사람의 생각과 내면에는 이미 여러 언어와 문화가 스며 있다. 텍스트를 수많은 인용이 교차하는 직물로 바라볼 때, 한 명의 ‘저자-신’에게서 내려오는 메시지라는 관념은 흔들린다. 쓰는 이는 자신에게 닿은 말들을 선택하고 엮으며, 독자는 읽는 동안 그 말들을 다시 연결한다.
그 과정에서 읽기가 향하는 곳도 달라진다. 감춰진 하나의 답에 도달하기보다, 텍스트를 이루는 관계를 따라가며 다시 풀어보게 된다. 여러 목소리가 독자의 자리에서 만나고 이어진다면 의미는 작품이 시작된 곳에만 머물 수 없다. 바르트가 말하는 ‘독자의 탄생’은 그렇게 쓰는 사람에게 모여 있던 시선을 읽는 사람에게로 옮겨놓는다.
읽기는 어떻게 생산에 참여하는가
「작품에서 텍스트로」를 함께 읽으며 이 움직임을 더 살펴보았다. 작품은 완성된 대상으로 제시되고 장르와 제도 안에서 분류되며, 작가와 소장자, 기관의 소유 관계에 놓인다. 바르트가 말하는 텍스트는 그 대상에서 일어나는 의미의 움직임에 가깝다. 서로 다른 언어와 기호가 부딪치고 연결되는 동안 읽기는 계속된다. 작품과 텍스트의 구별은 대상을 나누는 기준이면서, 우리가 그것에 어떻게 다가가고 참여하는지에 관한 물음이기도 하다.
하나의 기호를 읽는 동안 다른 기호가 떠오르고, 그 사이에 놓인 기억은 새로운 관계를 만든다. 텍스트의 복수성은 한 작품에 여러 해석이 가능하다는 말만으로 충분히 설명되지 않는다. 서로 다른 문화와 기억, 지식이 통과하며 읽기의 경로가 생겨나기 때문이다. 텍스트는 인용되고 다시 읽히는 동안 장르와 학문의 경계를 넘어 다른 자리에 놓인다. 누구의 것인지 묻던 자리에서, 어떻게 읽히고 무엇과 연결되는지도 함께 질문하게 된다.
악보와 연주의 관계를 떠올리면 이 과정을 조금 더 가까이 볼 수 있다. 같은 악보도 연주자를 만나면 매번 다른 소리로 펼쳐진다. 텍스트 역시 읽는 행위 속에서 새롭게 작동한다. 독자는 자신의 경험을 더해 관계를 만들고, 그 과정에서 텍스트의 생산에 참여한다. 읽기와 쓰기를 완전히 나누기 어려운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읽는 즐거움은 답을 찾았을 때뿐 아니라 익숙한 말들이 뜻밖의 관계를 맺고, 알고 있던 의미가 흔들릴 때에도 생겨난다.
저자가 사라진 자리에도 이름은 남는다
그러나 읽기의 가능성이 넓어진다고 해서 저자의 이름이 하는 일까지 사라질까. 푸코의 「저자란 무엇인가」는 그 이름이 남아 있는 자리를 살핀다. 저자의 죽음을 말한 뒤에도 작품과 글쓰기라는 개념 안에 저자의 권위가 머물고 있지는 않은지, 저자의 이름은 여전히 어떤 역할을 하고 있는지 묻는다.
어떤 글에 이름이 붙으면 우리는 그 이름을 따라 다른 글을 찾아 읽고, 서로 묶거나 구별한다. 이름은 한 사람을 가리키면서 동시에 작품이 분류되고 해석되고 유통되는 방식에 관여한다. 푸코의 ‘저자 기능’은 이 작용을 설명한다. 실제로 글을 쓴 사람이 누구인지와 더불어, 그가 어떤 조건에서 저자로 인정되며 이름에 어떤 권위와 책임이 따르는지도 살펴야 한다.
저자 기능은 역사와 제도에 따라 달라진다. 소유와 책임을 누구에게 돌리고 어떤 글을 하나의 작품군으로 묶는지에 따라 저자의 자리가 만들어진다. 비평도 작품들 사이에 일관성을 부여하며 그 자리를 구성하는 데 참여한다. 한편 텍스트 안에서 말하는 여러 주체를 실제 작가 한 사람과 곧바로 겹쳐놓기는 어렵다. 글을 만든 사람과 글 속에서 말하는 자리를 구별해야 하는 이유다.
푸코가 말하는 ‘담론성의 창시자’는 자신의 작품 이후에 다른 글이 쓰일 가능성과 규칙에도 관여한다. 그 영향은 같은 말이 반복되는 데서 끝나지 않는다. 뒤따르는 글들이 새로운 차이를 만들어낼 자리가 함께 열린다. 원전으로 돌아가 읽는 일도 처음의 뜻을 복원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다시 읽는 동안 지나쳤던 가능성을 발견하고, 그로부터 다른 질문을 시작할 수 있다.
바르트와 푸코를 함께 읽으며 의미를 만드는 일과 권한을 나누는 일이 어떻게 다른지 살펴보았다. 바르트의 논의가 독자의 읽기에서 생겨나는 의미에 주목하게 한다면, 푸코의 논의는 그 읽기가 어떤 이름과 제도 아래 놓이는지 돌아보게 한다. 여러 사람이 제작과 해석에 참여하더라도 모두가 작품을 수정하거나 공개하고 자신의 이름으로 제시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참여가 넓어지는 동안 권한도 함께 나뉘고 있는지, 두 움직임 사이의 간격을 살필 필요가 있다.
쓰는 독자, 읽는 독자, 구성하는 독자
이 논의를 바탕으로 작가를 ‘쓰는 독자’로 바라보았다. 작가는 앞선 작품과 사회의 기호, 타인의 경험을 읽고 선택하며 자신의 형식으로 엮는다. 무언가를 만드는 사람도 먼저 다른 말과 이미지를 마주한다. 관객은 그렇게 건네진 형식을 자신의 경험과 연결하는 ‘읽는 독자’로 생각해 볼 수 있다. 여기서 읽기는 문자를 해독하는 일만을 뜻하지 않는다. 이미지와 말, 기억과 형식을 받아들이며 그 사이에 관계를 만드는 일도 읽기에 포함된다.
비평가와 기획자는 여러 읽기를 문장과 전시로 배열하는 ‘구성하는 독자’로 바라보았다. 이 이름들로 직업의 경계를 새로 나누려는 것은 아니다. 한 사람도 제작하며 읽고, 읽는 도중에 메모하고, 자신의 해석을 다른 사람에게 전하며 세 자리를 오간다. ‘쓰는 독자’, ‘읽는 독자’, ‘구성하는 독자’는 바르트와 푸코의 결론을 그대로 옮긴 말이 아니라, 두 사람의 논의를 읽으며 이 발제에서 제안한 관점이다.
하나의 읽기가 글이나 이미지로 놓이면 다른 독자는 그곳에서 다시 읽기를 시작한다. 그 반응이 처음의 구성을 바꾸기도 한다. 읽기는 주어진 형식을 받아들이면서 다음 사람이 읽을 형식을 만드는 일로 이어진다. 다만 그 연결만으로 모두에게 같은 자유가 주어지지는 않는다. 누군가는 작품을 수정하고 공개할 수 있지만, 누군가는 정해진 조건 안에서만 반응할 수 있다. 읽기가 이어지는 자리에서도 각자가 가진 권한의 차이는 남는다.
비평 이후에 남겨둘 질문들
비평 역시 하나의 읽기를 다른 사람에게 건네는 일이다. 작품 앞에서 기존의 설명이 놓친 관계를 발견하고, 그것을 문장으로 엮어 다음 독자에게 전한다. 그 문장은 작품을 새롭게 바라보는 길을 열면서 특정한 해석에 힘을 싣기도 한다. 어떤 관계를 골라 강조하는 동안 다른 관계는 덜 보이게 된다. 비평이 의미를 만드는 데 참여한다면, 그 읽기가 무엇을 드러내고 무엇을 가리는지도 함께 돌아봐야 하지 않을까.
자신의 읽기가 어떤 근거에서 시작되었고 무엇을 선택하거나 놓쳤는지 밝히는 일은 그 질문에 응답하는 한 방법일 것이다. 다른 독자가 그 관계를 살피고 다르게 읽을 여지를 남기는 일도 비평에 포함된다. 읽기를 넓히려는 시도는 자신이 건넨 해석을 다시 검토하는 책임과 이어진다.
물론 이 관점만으로 남은 문제가 모두 풀리지는 않는다. 독자의 해석을 강조하는 것만으로 서로 충돌하는 읽기의 타당성을 판단하기는 어렵다. 저자 기능을 분석해도 누구의 기여를 얼마나 인정할지는 여전히 남는 문제다. 모두를 독자로 부르면 읽기와 제작의 연결을 볼 수 있지만, 그 사이에서 각자의 경험과 역할, 책임이 흐려질 수도 있다.
먼저 독자의 해석을 어디까지 열어둘 수 있을지 묻게 된다. 작품을 자신의 경험과 연결하며 새롭게 읽는 일은 중요하다. 그러나 그 읽기가 작품의 역사적 맥락이나 확인할 수 있는 사실과 어긋날 때, 우리는 무엇을 근거로 판단할 수 있을까.
의미를 만드는 데 참여하는 일과 저자의 권한을 갖는 일 사이에도 질문이 남는다. 여러 사람이 작품에 기여했다면 모두를 저자라고 부를 수 있을까. 참여했다는 사실은 작품을 수정하고 공개하거나 자신의 이름으로 제시할 권한과 어디까지 이어질 수 있을까.
끝으로 작가와 관객을 모두 독자로 바라보는 것만으로 충분한지 되물었다. 읽기와 창작이 이어져 있어도 각자가 직접 경험하고 제작한 것까지 같아지는 것은 아니다. ‘독자와 독자와 독자’라는 이름 아래 그 차이를 지우고 싶지는 않다. 서로의 읽기가 만나는 곳을 살피면서도 각자의 자리에서 감당해야 할 책임을 함께 묻는 것. 이 발제는 그 질문에서 다시 읽기를 시작하려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