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리를 뚫고 나온 한 송이의 음성
《Collected scape 새겨진 풍경》 · 스페이스사랑농장
1. 밀착, 중력으로부터
땅은 사람을 포함한 많은 생명들을 붙잡아두고 있다. 더불어 앞으로 지나가는 시간은 우리의 몸과 마음을 땅의 일부로 편입한다. 동시에 세계에 발을 딛었던 이들의 기억을 품게 된다. 세계의 역사, 나라의 역사, 지역의 역사, 그리고 나의 역사까지 우리의 발아래 모든 이들의 모습이 흔적으로 전이된다. 허리 언저리에 있는 단전에서 잉태된 우리는 공기와 하늘을 마주하며 몸을 스치는 모든 것들에게 잔상을 남긴다. 몸의 껍질과 수분은 입던 옷의 형질을 변하게 하고, 많은 이들이 남긴 발자국은 멀리 있는 이들에게 다가갈 수 있는 길을 만들며, 떠나간 누군가는 새로 맞이할 누군가의 흔적이 된다. 야생에서 땅은 몸과 배설물을 숨길 수 있게 하고, 식물과 나무에게는 영양분을 지속적으로 뽑아내는 뿌리를 만들어내며, 죽은 것들에게 땅은 0으로 돌아갈 수 있는 순환의 방으로 역할한다. 단전에 있는 배꼽처럼 땅은 많은 생명을 잉태하게 하고 때로는 보호하며 결국에는 죽음을 선물하는 공간이다. 우리는 이 땅 위에 실로 높은 탑을 세우곤 한다. 누군가를 내려다보기 위한 마천루와 그것의 계단이 되는 에너지 연료가 되는 땅 속 공간을 파헤친다. 그렇게 문명은 집이라고 한정되기에는 너무나 넓은 범주의 욕망을 쌓아 올려갔다. 작가 금진은 땅을 죽여가며 쌓아 올린 상아탑의 저 반대편을 바라보면서 두 발로 딛고 있는 바닥, 원시적 역할에 주목한다. 중력이 이끄는 죽음과 삶, 밤과 낮, 내일과 오늘을 밀착하는 땅에게 시선을 돌린다.
2. 허리를 뚫고 나온 한 송이의 음성
최초의 음성, 지금은 들을 수 없는 어제의 일들을 끄집어내는 방법, 작가 금진의 작업이다. 어릴 적 거닐던 동네는 끝없이 펼쳐지는 넓은 곳이었지만 몸과 마음이 자라면서 그곳은 점차 좁아지게 된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몸 끝의 오감과 정신 또한 다른 모습으로 성장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세대의 기억과 어휘가 다른 것은 무척 자연스러운 일이다. 금진은 시간을 머금고 있는 공간과 기억으로 부식된 장소 찾는다. 장소를 특정한다기보다 공간에 새겨진 껍질의 흔적을 매체로 활용하여 현장에서의 체험을 유도하는데 집중한다. 그리고 그는 시선을 머물게 한 장소에서 다양한 형식의 땅을 파헤치고 솎아내어 각자의 어느날과 일기를 떠오르게 한다. 나물 캐러 가는 할미의 호미와 같이 한지와 먹을 통해 단단하게 굳어버린 지평선을 솎아내어 이야기의 뿌리를 올라오게 한다. 다만, 연출된 공간에서는 눈으로 보이는 장면, 시각정보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지평선으로 대변되는 벽을 뚫고 올라오는 낡은 음성, 유리창을 비추는 빛의 냄새, 천장을 어루만지는 촉촉한 촉감을 피어오르게 할 뿐이다.
3. 소리가 들리는 곳
금진의 이미지들은 형태와 색에 집중되는 시각적 요소보다 목소리와 진동에 집중하게 하는 청각적인 요소가 두드러지는 작업이다. 그는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벽, 지탱하는 마루, 빛을 투과하는 창을 땅이 가지는 흡수와 밀착의 공간으로 규정한다. 그렇기에 그가 주로 활용하는 탁본이라는 매체는 무언가를 반영하고 찍어내고 담아내는 것을 넘어 기억이 묻힌 땅으로 손을 내밀고 귀를 기울이는 일종의 터치라고 볼 수 있다. 종이, 천, 헝겊 등 그가 내민 손, 밀착의 언어는 기억의 유물을 하나씩 찾아낸다. 누군가의 명확한 일상이나 사건을 담기보다 누구나 연상할 수 있고 이입할 수 있는 원시적인 기억을 건드린다. 특히, 그가 주로 사용하는 얇은 종이와 천은 빛과 장면의 투사를 적극적으로 흡수하고 허용한다. 이를 통해 낡음으로 은유되는 표면, 외부와 구분 짓고자 만들어진 벽과 천장이 품고 있는 냄새와 소리가 자연스레 드러날 수 있게 된다. 강물이 땅을 깎고, 바람이 돌을 갈며, 시간이 꽃잎을 하나 둘 떨구게 하듯 이곳에 존재하는 모든 이들에게 오늘의 아쉬움과 내일의 애도를 상기하게 한다.
우리는 모두 어린 시절에서 비롯되었다. 어머니의 뱃속에서 잉태되었고, 아주 오랜 과거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 원자로 흩어져 있었다. 하나의 모양과 구조를 만들어내기 위한 무수한 사건과 사고의 뒤엉킴에서 우리는 작은 점이 될 수 있었고, 이윽고 세상에 나와 중력을 견디고 밀어내면서 내일의 사라짐을 기다리고 있다. 금진은 우리에게 되묻는다. 어디서 왔고, 또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를..., 배꼽에서 자라난 한 송이의 메아리를 따라서 우리가 잃어버린 냄새와 촉감, 진동이 담긴 땅으로 소환하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