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oho Park박소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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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RITICISM & PREFACES

어루만지는 빛

《발화점 Ignition Point》 · 갤러리 이목

1. 거주를 위한 공간

거주를 위해 만들어진 집은 영원할 수 없다. 인간이 만들어낸 모든 것들 또한 영원할 수 없다. 더 범주를 넓혀보자면 자연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영원할 수 없다. 우리 인간은 지속을 위해 보금자리를 만든다. 최초의 집은 자연 그대로의 원형을 활용하여 외부환경을 막는 역할만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문명 이후로 우리의 보금자리는 점차 단단해지고 편리해지고 치장되어 간다. 그렇게 도시가 만들어지고 효율과 용적을 위해 높이의 욕망을 쌓아가고 있다. 작가 금진은 최근 누군가의 삶의 흔적이 깃든 주거공간을 탐색하기 시작했다. 주인 곁을 떠나 쓰임을 다한 공간, 폐허로 돌아가는 전환점에 있는 공간을 주로 탐색한다. 집은 점유자가 존재한다. 이를 위해 바닥이나 공간의 온도를 높이고 바람을 통하게 하며 짐을 보관할 수 있는 장소를 제공한다. 여러 의미에서 사용자의 이야기가 온전히 담길 수밖에 없는 공간이다. 하지만, 이어받을 점유자나 소유자가 없는 시간이 오게 되면 집은 폐허의 절차를 밟는다. 이때의 집은 스스로의 역할을 점차 잃어버리게 된다. 외부의 환경을 내부로 흡수하고 땅의 깊이와 시간을 허용한다. 작가 금진은 모든 쓰임과 활용을 소진한 전환의 공간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2. 익명의 공간

금진은 익명을 목적으로 만들어진 곳에 관심을 두지 않는다. 개별적 이야기와 이름을 가지고 있었으나 점차 그 이름을 잃어버리는 공간으로 변환되고 나아가는 시간에 시선을 집중한다. 벽의 구분과 창문의 필요성이 사라지고 본래 지니고 있었던 보호의 역할이 사라진 폐허 직전의 시공간이다. 어쩌면 작가는 역할을 다한 것에 대한 애도로 벽과 땅과 창의 껍질을 떠내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사람의 흔적이 사라진 이 공간은 흩날리는 먼지와 빛바랜 색으로 가득 차 있다. 벽의 속살은 훤히 드러나 있고 창을 가리고 있는 커튼의 조각은 수많은 시간의 빛을 흡수한 채 땅과 가까운 색으로 변모했다. 금진은 이 공간에서 떠낸 익명의 소재들을 다른 공간에 이식한다. 그에게 있어 전시는 끝말잇기와 같이 자신이 관찰하고 흡수한 공간을 다른 공간으로 이전하여 또 다른 익명의 공간을 만들어내는 일이다. 그가 수집한 사물과 구조의 표면은 오랜 시간이 서린 단단한 냄새와 창문을 뚫고 들어오는 빛바랜 소리가 맺혀있다.

3. 밀도와 부피

건물은 지어지기 시작할 때 가능성을 내포한다. 물건을 파는 곳, 음식을 만드는 곳, 그리고 거주하는 곳 등 각자의 내일을 그리며 점유자의 이야기를 남긴다. 그렇기에 벽과 창으로 만들어진 건물은 시간의 밀도와 부피를 쌓아간다. 여기서 건물과 공간은 매뉴얼과 공동체를 위해 만들어진 곳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특정 개인, 혹은, 소규모 집합이 스스로의 안위를 위해 몸과 마음을 의지하는 공간이다. 누군가의 집, 작은 점포, 소규모 식당은 포함될 수 있지만, 생산을 위한 공장, 치밀한 조직체계로 운영되는 회사, 거대한 자본과 유통으로 만들어진 대형마트는 포함되지 않는다. 보다 얇고 작은 층위의 이야기, 특정 개인의 이야기가 공간을 점유할 때 그곳은 살아있는 유적이 될 수 있다. 사람의 흔적과 땅의 냄새가 충돌하고 밖에서 부는 바람을 온전하게 허용할 수 있는 너그러운 창이 존재하는 곳이다. 작가는 이곳에서 얇은 종이와 먹을 이용해 천장, 벽, 바닥의 껍질을 떠낸다. 이를 위해 주변을 정리하고 눈과 귀, 피부의 세밀한 감각에 몰입한다. 그리고 개별자가 남긴 기념비들이 서서히 떠오르기를 기다린다.

4. 부드럽고 따듯한 주름

전시공간에 펼쳐진 금진의 작업들에는 누구의 것인지, 어디서부터 왔는지 알 수 있는 단서가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공간에 배치된 창문의 위치, 기둥의 구성, 시간을 간직한 사물을 통해 익명의 건물, 혹은 폐허의 이미지를 연상할 수 있게 한다. 이 때문에 작가에게 전시는 매우 중요한 매체로 작용한다. 익명은 이름 없음으로 해석될 수도 있지만, 우리 모두의 이름을 대변하기도 한다. 그래서 금진은 공동의 이름이 담긴 삶과 죽음, 사라짐과 생겨남의 사이의 시공간을 관객에게 소개한다. 아직 죽지 않은 공간의 껍질을 떠내어 오래된 주름에서 느껴지는 온기와 빛의 속성을 담아낸다. 이는 사라짐에 대한 아쉬움의 언어이자 흐려진 눈동자를 어루만지는 재생의 손짓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