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불장 속 눈송이
《이불장 속 눈송이》 · 다이브서울
1. 모두의 이야기
우리는 오랜 시간 이야기에 주목해 왔다. 시, 소설, 드라마, 영화 등 시간이 지남에 따라 이야기를 전달하는 매체와 방법들이 발전되어 왔고 이를 즐길 수 있는 플랫폼 또한 확장되어 왔다. 인간의 역사에서 이야기는 매우 중요한 힘을 가진다. 집단, 인물, 권력을 만드는 초석이 되고 여러 이념으로 흩어진 많은 이들을 모이게 하고 규합하게 한다. 그리고 언젠가 사라지게 될 오늘의 우리가 먼 훗날의 또 다른 우리에게 문명의 지속을 위한 중요한 기록을 전달할 수 있다. 작가 진지현은 자신의 손끝에 유전된 얇은 이야기의 단면을 투명한 화면에 새긴다. 다음 이야기에 대한 궁금증, 최초의 장면에 대한 질문, 그리고 결말에 대한 기대는 한 개인에게서 시작되어 모두의 질문으로 만들어진 상상의 공간을 만들어낸다.
2. 우화처럼
강아지, 나비, 사슴, 곁에 있는 작은 것에서부터 점차 멀어지고 있는 생명들, 지현의 화면에 등장하는 소재들이다. 그가 만든 이야기와 화면에는 끝과 시작이 맞물리는 단서들이 자리하고 있다. 처음부터 설계된 시나리오는 아니지만 어렴풋이 보이는 장면을 쫓다 보면 누구나 작은 단위의 사건을 만들어낼 수 있다. 전시장에 펼쳐진 그의 작업들은 이렇게 하나하나의 목차를 나름대로 엮어 각자의 서사를 만들어보는 재미가 피어난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이 과정이 매우 자연스러운 이유는 등장하는 꽃과 나무, 생명이 깃든 모습이 자신의 자리를 꼭 움켜쥔 채 관객을 응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어떤 비밀스러운 이야기를 간직하고 있지 않고, 그저 자연스레 관객에게 온전한 모습을 훤히 드러내고 있다. 멀리서 보면 숲의 풍경처럼 보이지만 가까이 다가가면 생명이 뿌린 가지각색의 냄새와 소리들이 보인다.
3. 은하수처럼 흩날리는 냄새
작가가 활용하는 재료는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나무에 인두로 새긴 음각 작업, 그리고 한지를 활용하여 종이의 질감과 색을 적극적으로 드러나게 하는 평면작업이다. 이 두 가지 매체가 전시공간에 배치될 때 확장되는 세계관이 만들어지게 된다. 사각의 화면 안에 있던 오브제와 이야기들은 나무의 표면을 인두로 태워 만든 이야기와 병치되게 되는데, 이 연결되는 구조가 작가의 작업에 세계관을 만들어주는 역할을 한다. 더불어 지현의 작업은 후각을 자극하는 냄새가 담겨 있다. 오래된 이불의 솜뭉치가 머금고 있는 꽃의 이야기와 어머니의 어머니로부터 이어져온 자개장의 반짝거리는 표면처럼 많은 시간 동안 빼곡히 쌓인 드라마가 포개져있다. 누구의 누구로부터 전해져 온 소리와 냄새의 단서는 전시공간에서 지현의 손끝을 통해 리듬과 향으로 전환된다. 청각과 후각이라는 감각 작용이 맥락과 구조가 깃든 이야기로 변환하게 하는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은 바로 관객이다. 공간에 산발적으로 흩어진 장면들은 관객의 동선과 시선을 통해 서로가 서로에게 맞물려 예상치 못한 결말과 또 다른 이야기의 시작을 만들어 낼 수 있다.
4. 기억의 소리
어릴 적, 할머니와 할아버지에게 들었던 무용담과 동화 같은 이야기들이 있다. 말 안 듣는 아이를 데려가는 망태할아버지, 할아버지의 누이를 고문한 일본 순사, 사람의 손톱을 먹고 자라는 쥐 등 그들이 겪었던 체험에서 비롯된 경험담과 구전으로 전해 내려오는 설화까지 실로 많은 이야기들을 듣곤 했다. 이야기는 주로 그들의 육성을 통해 전달되는데, 발화의 과정이 주는 묘미는 냄새와 같은 감각 체험이 묘사되는 동시에 구전의 과정에서 내용의 변주가 일어난다는 것이다. 스토리를 전달하는 자의 마음변화, 반복에 대한 지루함이 반영되는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이 감각 묘사와 내용의 변주는 구전의 가장 큰 특징이며 필요이유이다. 최초의 이야기에 세대별 전달자의 개입이 허용되며, 이 허용은 우리의 민화가 그렇듯 다양한 해석과 감각의 포용력을 지닐 수 있기 때문이다. 작자 미상의 이야기, 그러나 모두의 기억에 새겨진 비슷한 낱말과 장면, 그리고 목소리의 체취는 작가 지현이 선택한 화면의 배경으로 번진다. 그리고 그 위에 자신의 기억에서 비롯된 상상의 어휘를 가지런히 배열하여 우화와 일화가 만나는 세계관을 만들어낸다. 나무, 그리고 그 나무로 만들어진 종이의 흡수와 반발을 최대한 수용하면서 우리가 가진 유전의 기억에 조그마한 목소리로 속삭인다. 작가 진지현의 이야기는 시간과 시간, 사람과 사람, 사물과 생물의 비무장 지대를 만들어내고 은하수처럼 무한하게 생산되는 어제와 내일의 체취와 육성을 만나게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