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oho Park박소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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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RITICISM & PREFACES

그리고 미완의 기념사

《납작한 삼차원 경량 공원》 · 스페이스 루트

1. 효율, 그 깊은 우물 속으로

수평 이동을 전제로 시간의 단축을 가능하게 하는 교통수단, 두발의 에너지를 소모하지 않고 높은 곳으로의 수직이동을 가능하게 하는 건축물의 승강장치는 자본효율의 극대화를 향해 나아간다. 우리는 더 멀리 도달할 수 있고, 더 높게 올라갈 수 있게 되었다. 생존에 필요한 가장 기본적인 수단, 의식주는 보호와 지속을 넘어 사치와 욕망을 위해 소비되기도 한다. 닿을 수 없었던 곳에 닿게 되고, 만질 수 없었던 것을 만질 수 있게 되면서 필요이상의 것을 넘나들게 되었다. 그러나 과잉은 언제나 드넓은 사각지대와 인지할 수 없는 낙오를 만들어낸다. 절대다수, 모든 인류를 구원할 수 없는 이 효율의 시스템은 정착과 안정을 해체하여 불안한 이동경로를 생산한다. 효율은 언제나 자본을 근간으로 하기에 더 넓은 영토, 더 높은 위치를 확보할수록 우연과 우발적인 야생의 변칙공간은 점차 멀어지게 된다. 자연스레 우리는 안정되고 정착가능한 공간을 확보하게 되지만 이로 인해 만들어진 편의와 안락의 깊은 우물 속에 스스로를 고립한다. 우리는 지금 상호작용을 위한 연대의 시대에서 영역보호를 위한 개별자들의 시대를 지나고 있다.

2. 야생을 향하여

도시는 울타리를 만드는 것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외부의 침입을 막고 내부의 안정과 번식의 지속을 도모하기 위해 야생으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하는 벽을 다양한 형태로 만들어냈다. 무수한 시간이 흘러 이곳은 수많은 이해관계와 끈으로 얽힌 거대한 유기체가 되었다. 구조와 기능은 이제 생존을 위한 역할을 넘어 과잉의 공간으로 부풀어가고 있다. 그러나 이 거대한 소비의 공간은 개인을 고립하고 고정하게 한다. 이유와 목적이 분명해야 하는 단단한 연결고리로 이어져 있기 때문에 각자의 역할, 기능, 이름의 한정된 프레임에서 벗어나기 힘들다. 우리는 점차 이 깊은 동굴에서 조난되어 오랫동안 질게 이어진 서로의 연대를 끊어가고 있다. 오감을 사용하지 않고 무언가를 얻을 수 있게 되었다. 만지지 않고, 먹어보지 않고, 맡아보지 않고서 무언가를 소비한다. 이제 이곳에는 서로를 넘나들 수 없게 하는 가상의 거대한 틀, 높은 벽이 솟아올랐다. 이제 안과 밖은 불안을 밀어내고 스스로를 안전하게 하는 구분점으로 작용한다. 공동체는 거푸집, 껍질만 남아 있으며, 우리에게 다가오는 비효율이 내재된 개체와 조직을 밀어낸다. 작가 키무는 과잉으로 비롯된 이 무감각의 시간, 효율에서 시작된 비만의 공간에서 이쪽과 저쪽을 쉽게 오갈 수 있는 오브제, 안팎이 구분되지 않는 조형을 만들어낸다. 그의 작업은 단단함과 거리를 둔다. 서둘고 완성되지 않은 미완의 동선과 공간에서 관객의 손과 발이 오가는 상상 공간을 위해 여지를 남긴다. 누군가의 개입을 받아들이고 흡수하는 이동을 유도하는 키네틱의 그것과 닮아 있기도 하지만, 천장, 땅, 벽에 고정되지 않고 스스로의 축과 다리를 지지대로 설정한다. 이 조형물의 이동은 매우 자연스럽다. 애써 균형을 유지하는 작은 날개, 누군가의 팔꿈치와 스치길 기다리는 깃발, 언제든 이동할 수 있는 준비된 바퀴는 공원으로 설정된 이곳에서 언제나 익명의 얼굴을 기다리며 미완의 손짓을 기다린다.

3. 어디로든 갈 수 있는 발

통상적으로 기념비는 움직이지 않는다. 과거의 일을 오늘의 기억에 봉인하고 잉태된 내일로 나아가야 하기에, 과거에 있었던 중요한 사건과 인물, 이야기를 시간에 희석되지 않게 단단하게 묶어 고정해야 하기 때문이다. 인간의 시간이 지속되는 한 이 기념을 위한 덩어리는 단단하고 견고하게 자신의 자리를 지킨다. 그렇기에 기념비는 널리 알려지기 위해 접근성이 용이한 곳에 놓인다. 공공의 이익과 부합하는, 누구나 접근 가능한 곳에 자신의 자리를 만든다. 그래서 기념비는 보편적으로 그것을 기리기 위한 곳, 광장, 공원, 혹은, 그 일과 인물이 자리했던 곳에 고정된다. 키무의 작업은 기념비적 특성을 띠지만, 고정되지 않고 움직임을 유도하도록 만들어졌다. 그러나 특정한 대상이나, 사건과 이벤트를 기리지 않는다. 오히려 지금, 여기 있음을 강조하기 위해 놀이기구와 장난감의 역할을 잠시 빌린다. 내일의 회고하거나 내일을 향하지 않고, 오늘 만나게 될 관객과의 시간에 집중한다. 경험과 체험을 위한 조각, 변형과 이동을 위한 기념비로써 작동한다. 그의 작업은 기존의 기념비가 지닌 의미와 역할처럼 공공의 미래를 향한다거나 유토피아를 그리지 않는다. 오히려 한 명, 개별자들 각각에게 필요한 가볍고 효율적인 기념비, 손과 발의 움직임을 허용하는 유연한 기념비의 가능성을 그리며, 투사되고 투영되는 허용의 공간을 만들어낸다. 이 공동의 공간에서는 눈과 귀의 촉각화가 발현되고, 관람객 스스로에게 능동적인 움직임의 가능성을 상상하게 한다.

또한, 전시공간에서 키무의 작업은 고정된 사물, 고정된 시점이길 거부한다. 가능성을 내재한 미완의 사물, 그리고 변화를 가정한 각각의 좌표는 우리가 유년시절에 흔히 만들고 부수기를 반복한 각자의 놀이공간을 연상하게 한다. 그는 간단하지만, 쉬이 할 수 없게 된 이 원시의 감각을 다시금 소환하게 한다. 그가 만들어낸 가변의 오브제들은 공간에 새로운 벽과 길에 대한 가능성, 즉흥적으로 변화되는 통로의 여지를 남겨 놓는다. 이는 다른 시간에 방문하여 서로를 지나치게 될 관객들, 그리고 아직 만나지 않은 이들에 대한 환대의 여지를 만들어내는 일이다. 서로 다른 관객이 오고 감에 따라, 이 공간으로 얽힌 이들, 그리고 이것을 만들어낸 작가는 보이지 않는 곳에서 부드럽고 자연스러운 인과의 공간을 만들어낸다. 어찌 보면, 현재 진행형의 과정을 담고 있는 건축현장, 내부의 심지와 구조가 드러나는 해체의 과정을 담고 있는 철거 현장을 닮았다. 이 두 가지, 생산과 해체의 이중적 공간을 동시에 허용하고 있는 키무 작가의 작업은 우리가 기거하는 바로 이곳의 구조와 유사하다. 이상적 공간을 지향하지만, 언제나 미완의 땅 위에 발을 딛고 있는 우리 자신에 건네는 독백이 아닐까. 그렇기에 그의 작업은 점차 고정되고 고립되는 오늘의 공공 공간에서 우리 자신에게 보내는 조금 더 유연하고 변칙 가능한 가능성을 만들어 낼 수 있는 능동의 기념사라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