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감각의 숲
《PAINTED FOREST》 · 갤러리 도스
1. 풀내음이 자라나는
오래된 나무의 진액과 수액처럼 물감은 평평한 캔버스 위에 단단히 붙어 있다. 붓이 지나간 자리에 흔적을 남기는 붓 자국의 잔해와 사뭇 다르다. 작가 임호섭의 화면은 이파리가 무수히 붙어 있는 숲을 연상하게 하지만, 풍경으로 인지되지 않는다. 오히려 겨울이 되어 쌓이는 낙엽의 질감과 바스락거리는 소리를 떠올리게 한다. 고요와 적막의 풍경이 아니라, 바람에 흔들리고 비에 젖을 수 있는 습기와 건조가 반복적으로 일어나는 환경의 내음이 담긴 화면이다. 이 때문에 그의 작업은 풍경의 요소를 포함하여 오브제, 사물로써의 숲을 함께 품고 있다. 여러 가지 구성요소가 조합되어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파노라마와 더불어 명료한 이름이 붙어있는, 보다 명징한 숲이 보인다.
임호섭이 이번 전시에서 전개하는 ‘PF(Painted Forest) 시리즈’는 단단한 엮임으로 이루어진 장력을 발산한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풍경으로써의 숲이 아니라, 건축적이고 기념비적인 하나의 조형물로 인지된다. 애초에 이 작업은 작가가 실행했던 설치 작업에서 파생되었기에 원본의 입체 작업이 지닌 덩어리감을 포용하고 있다. 입체가 평면의 회화로 변형되는 이 과정에서 서로 얽혀있는 가지와 줄기의 연결 구조가 나타난다. 이 숲은 자연의 대상으로부터 시작해 눈과 빛이 닿는 자리에서 서서히 그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관찰에서 재현과 표현으로 귀결되는 방식이 아니라, 관찰과 해석을 거쳐 중첩과 편집의 과정으로 완결된다. 흘러가는 시간에 내재된 사물 원본의 형태와 그것을 덮는 색채, 그리고 다음을 상상해 내는 임호섭의 시선이 결합되어 매우 독립적인 도상으로써의 숲으로 발현되고 있다.
2. 피부와 몸 사이, 공감각의 숲
임호섭의 숲은 매우 단단하고 묵직하다. 개체가 모여 집합이 되는 구성 방식이 아니라, 서로를 지탱하고 견고하게 엮여있는 응축된 형태의 숲이다. 그의 화면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격자의 패턴이 드러나는데, 이는 작품의 단단한 구조를 설명해 준다. 작업의 진입 단계에서 작가는 일정한 규격으로 실타래를 풀어 가로와 세로선이 교차하는 격자의 패턴을 설계하는데, 두께감이 있는 이 실은 캔버스 직물 위에서 반복되는 프레임을 형성한다. 이는 마치 건축물의 철근이나 기둥이 콘크리트의 경화 과정에서 구조적 안정성을 제공하는 것과 유사한 역할을 한다. 이 격자의 구조 안에서 작가의 손은 물감을 통해 작용과 반작용의 반복을 쌓아간다. 실의 두께로 인한 경계는 때로는 붓질에 불편함을 유발하기도 하지만, 점차 익숙해지면서 평탄한 캔버스와는 다른 붓질의 경로를 만들어낸다. 이 과정이 진행되면서 그의 숲은 점차 탄탄해진다. 이 견고함 속에서 매우 뚜렷한 촉각의 숲, 청각의 숲, 후각의 숲이 직조되어 중력과 척력의 시간이 함축된 기념비적 숲이 발현된다. 이윽고 그의 숲은 시선을 넘어서는 공감각적 체험을 제공하는 장소로 기능하게 된다.# 빛을 향해
대부분의 식물은 땅으로부터 하늘로 줄기와 가지를 뻗는다. 나무의 양분은 땅과 하늘에서 비롯되는데, 특히 잎과 열매를 품고 있는 가지는 하늘 위에 있는 빛에 지대한 영향을 받는다. 계절에 따라 초록에서 노랑으로, 적갈색으로 변한다. 겨울이 되면, 새하얀 옷을 덮게 된다. 이것을 인간이 경험하는 시간의 흐름으로 빗대어 보면 살아있는 것이 죽고, 죽은 것들이 새로운 생명의 양분이 되는 과정이다. 하지만, 앞으로 흘러가는 시간의 속성은 우리에게만 적용되는 개념일지도 모른다. 시간과 중력, 위와 아래와 같은 개념은 인간이 만들어내는 일종의 기준점일 뿐이다. 광활한 우주의 공간에서는 사방의 구분을 두지 않는다. 대부분의 개념은 두 가지 이상의 개체가 관계하여 만들어낸 사건에 국한되는 이야기다. 이 우주가 만들어내는 물리적인 관점에서 나무를 바라보면 스스로가 원하는 양분을 향해 뻗어가는 유기체다. 땅속 생명들의 양분을 빨아들이는 뿌리를 기점으로 기둥을 통과하여 태양 빛을 향해 여러 갈래의 가지를 뻗어낸다. 이 과정에서 나무는 시간의 표식을 몸속 깊숙이 새기게 된다. 작가 임호섭은 자신의 시간을 스스로의 몸 안에 새기는나무와 같이 숲을 통해 경험한 감각을 캔버스 위에 새긴다. 위와 아래를 구분하지 않고, 방향이 구별되지 않는, 풍경과 사물의 경계가 무너질 때 만날 수 있는 총체적 관점에서의 숲이다. 그 숲은 우리가 지닌 피부와 몸 사이를 유영하여 공감각의 숲으로, 지금, 우리 앞에 다가와 있다. 그리고 우리의 눈을 매만지며, 응축된 두꺼운 잔향과 함축된 계절의 소리를 퍼트린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