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oho Park박소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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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RITICISM & PREFACES

커튼을 통과하는 빛

《사이의 집》 · 예술공간 집

1 경계 위에서

흑백사진은 유채색 사진보다 외곽의 형태가 선명하다. 눈으로 보이는 수많은 색을 재현한 이미지보다 두 가지 색의 스펙트럼으로 압축된 이미지는 모양과 경계, 빛과 그림자의 대비를 명확히 드러낸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렇게 형태가 명확해지는 순간, 오히려 경계가 교차하고 차이의 공간이 모호해지는 경우가 있다. 실체를 인지하는 순간, 혹은 닿을 수 없었던 곳에 비로소 손을 내미는 순간, '이쪽'과 '저쪽'이라는 이분법적 의미는 사라진다. 이곳에는 경험하고 체험하는 '나'와 '대상'이 실존할 뿐이다. 도구의 사용법에 사로잡히지 않고 대상을 자유롭게 대할 때, 겉모습에 현혹되지 않고 그것의 내부를 인지할 때, 그리고 글의 형태와 맥락을 넘어 행간이 비로소 드러날 때 우리는 교감하고 이해할 수 있다. 정혜성 작가는 많은 것이 구분되고 나누어지는 오늘날의 장소에서 서로를 다시 엮어낼 수 있는 방법과 체험의 공간을 탐색한다. 불투명한 껍질, 의미가 탈락한 텍스트, 천천히 춤추는 불빛, 감싸고 연결하는 실은 구획된 시간과 공간 사이를 거닐며 어디로든 닿을 수 있는 편지를 써 내려간다.

2 친밀하게

집의 경계는 어디서부터 어디까지일까. 물리적인 집은 인간의 신체를 보호하기 위해 외부로부터 구축된 구조물을 의미한다. 그러나 관념적인 집은 그보다 훨씬 풍부한 의미와 사건을 품고 있다. 소설과 시에서 집은 때때로 내가 입고 있는 옷이 되거나 그리운 어머니의 상차림이 되기도 하며, 이제는 만나기 힘든 옛 친구에 대한 그리움으로 은유 되기도 한다. 그렇기에 집은 기댈 수 있고, 만질 수 있으며, 온전히 쉴 수 있는 다양한 감각을 함의하고 있다. 타인과 외부로부터 분리되어 안식을 취하는 곳, 작가 정혜성의 집은 곁에 있는 소박한 사물과 시간에 대해 속삭인다. 손으로 움켜쥔 유리컵, 식사 전 바라보는 시계, 그리고 평온하게 흘러가는 시간은 현상 세계와는 다른 흐름과 속도로 다가온다. 이곳에는 친밀함을 넘어 신체와 접촉하고 이어진 수많은 것들이 존재한다. 연민, 슬픔, 그리고 사랑이 깃든 이 사물들에는 누군가의 숨결과 기다림이 친숙하게 자리 잡고 있다. 작가는 집에 놓인 것들을 만지고 접촉한다. 이것은 단순한 신체적 동작이 아니다. 그가 집에 머무는 순간부터 공간과 사물은 그의 일부로 작동한다. 그것들은 항상 그 자리에 고정된 물건도, 신체의 명령만을 기다리는 수동적인대상도 아니다.

이번 전시에서 작가는 집이라는 공간에서 일어나는 ‘관계’에 주목한다. 같은 종(種)이 아닌, 나의 피부와 맞닿는 사물 및 대상과의 관계 맺음을 천천히 관찰한다. 이것은 하나의 질문을 통과하여 여러 개의 회신으로 화답한다. 집, 그리고 방은 매우 사적인 장소다. 연약한 신체가 기댈 수 있는 보호막이자 내밀한 모습이 드러나는 안락한 자리다. 또한 이곳은 매일 탈각되는 신체의 일부가 사라지고 다시 자라나는 순환의 공간이기도 하다. 머리카락, 각질, 수많은 흔적이 떨어지고 치워지기를 반복하며 교체와 교차가 이루어지는 장소다. 작가가 이번 전시에서 집이라는 공간을 선택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아마도 그것은 오브제와 사물에 집중해 왔던 이전 작업에서 확장되어, 그의 사유가 머물고 시작되었던 '최초의 장소'이자 '지속의 공간'을 돌아보고자 함이 아닐까. 반투명한 커튼을 뚫고 기어이 들어오는 빛, 밤이면 한결같은 그림자를 걷어내는 스탠드, 무거운 몸을 지탱해 주는 의자, 그리고 지친 어깨를 받아주는 침대는 언제나 친절하다. 그의 집과 주방에서 도구와 사물은 자동적인 언어를 구사한다. 이들은 작가 정혜성으로부터 빚어진 '연장된 신체'이자, 끊임없이 말을 주고받는 친근한 대상으로 치환된다.

3 커튼을 통과하는 빛

지금까지 정혜성의 작업에는 종종 하얗고 불투명하며 연약한 질감이 등장했다. 오래된 철창을 감싸는 백색의 실, 불투명한 종이 아래 흔들리는 유약한 불빛, 단단한 바닥 위에 맺힌 몽글몽글한 형상들은 차갑고 날카로운 것들을 흰색의 손길로 감싸안는다. 차갑고 단단한 촉감이 지배하는 세계관 속에서, 작가는 그것들을 다시 연결하고 결속시킬 수 있는 소재와 질감을 소환한다. 작가 한강의 소설 『흰』에서 백색이 배내옷, 백발, 수의, 눈, 쌀을 통로 삼아 삶과 죽음의 의미를 상기하듯, 정혜성의 작업에 등장하는 백색의 질감 역시 그와 유사한 궤적을 지니고 있다. 필연적인 시간의 흔적, 하염없이 연약한 사물, 그리고 연민을 자아내는 존재들에 이르기까지 정혜성의 ‘흰색’은 차갑고 날카로운 것들을 부드럽게 끌어안는다. 이로써 빛과 그림자의 영역이, 차가운 것과 따뜻한 것의 교차 지점이, 그리고 고정된 것과 움직이는 것의 경계가 허물어진다. 모든 것이 효율적으로 연결되고 빠르게 도달하는 오늘날, 우리는 작은 터치 하나로 타인과 접속한다. 작가가 설정한 집과 사물, 그리고 일인칭의 개인 또한 유기적으로 연결된다. 다만, 네트워크 환경에서처럼 휘발되는 가벼운 접속이 아니라, 사물의 온기와 신체의 흔적을 경유하여 비로소 마음속에 고착되는 깊은 유대로서의 접촉이다. 리미널(Liminal), 작가가 최근 주목하고 있는 이 개념은 두 공간의 경계이자 여기이면서 저기일 수 있는 중간 영역을 의미한다. 정혜성의 '흰색'은 바로 이 문턱의 지점과도 맞닿아 있다. 유난히 희고 투명한 재질의 매체들은 경계를 지우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경계 위에 머물며 안과 밖을 은은하게 연결한다. 이 투명한 층위들을 통과하며 우리는 비로소 보이지 않던 사물의 내부와 실체로서의 집을 마주하게 된다. 시간의 두께가 쌓인 공간, 모든 것들이 투명하게 맞닿아 있는 집, 나의 껍질들이 보관된 입방체, 그리고 여전히 나를 기다리는 단 하나의 공간인 집은 언제나 같은 위치에서 부드럽고 단단하게 서 있다. 작가에게 집은 그렇게 자신의 몸에서부터 파생된 경계 없는 신체가 발현되는 장소다. 아니다. 장소와 영역으로 국한되는 공간의 개념이라기보다, 연장된 신경계가 발현되는 개별적인 몸 그 자체일지도 모르겠다. 타자와 타인이 침투할 수 없는 가장 안전하고 안락한 몸, 그리고 내쉬는 공기와 흩날리는 먼지, 커튼을 뚫고 들어오는 빛의 무리까지 모두 겸허히 받아들이는 너그러운 태도가 작동하는 몸이다. 작가 정혜성은 바로 그곳에서 탈각되고 탈락된 것들과 포옹하면서 가장 끈끈한 하루를 갱신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