삐뚤빼뚤
《삐뚤 빼뚤》 · 공간 운솔
1 소진
도시는 오직 효율이라는 단 하나의 과녁을 향해 나아간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멈춤 없는 속도전을 감행하고 있다. 인간의 이동 수단과 소통의 방식들은 하루가 다르게 매끄럽고 빠르게 진화한다. 검은 아스팔트 위를 달리는 자동차의 동력은 기어와 엔진의 물리적 작동에서 매끄러운 전기회로 시스템으로 전환되었고, 이로써 물질이 에너지를 전달할 때 발생하던 미세한 시간차마저 극복해 버렸다. 액정 화면 너머로 목소리와 얼굴은 실시간으로 공유되며, 오랜 세월 인간을 규정해 온 시차와 거리라는 물리적 한계를 무색하게 만든다. 도시에 맞물려 있는 대부분의 시간과 공간은 오직 이윤과 생성의 효율만을 강조하며 집요하게 재편되는 중이다. 속도가 정점에 달할 때, 너무나 많은 것들 또한 삽시간에 지워진다. 축적된 생각과 기술은 진보의 칼날 뒤로 갱신되고 탈락한다. 지루하고 고루한 것, 이미 지나버린 낡은 생각들은 효율이라는 거대한 체제 안에서 더 이상 머무를 곳을 찾지 못한 채 쓸모의 공간 밖으로 밀려난다. 오래된 골목과 낙후된 기억들이 도시의 유기적 재개발 속에서 순식간에 흔적도 없이 사라지듯, 거대한 유기체 속에서 가능성과 가치의 수명은 점차 짧아지고 있다. 소진되고 있다.
2 대면
반도체. 광물을 화학적으로 분해하여 정보를 저장하고 계산하는 이 작은 물체는 실로 방대한 이미지를 생산해낸다. 0과 1이라는 이진법 체계로 구동되는 디지털 세계는 수많은 이야기를 증식시키는 동시에, 역설적으로 자발적인 상상의 공간을 닫아버리기도 한다. 과연 디지털은 만질 수 없는 ‘비사물(非事物)’의 영역에만 존재할까? 아날로그와 디지털은 결코 넘을 수 없는 경계를 두고 각자의 영토를 보존하고 있는 것일까? 디지털 또한 시간의 흐름 속에서 영원할 수 없다. 디지털 역시 열화(劣化)하고 낡아가며, 끝내 소멸한다. 손으로 움켜잡을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영원히 보존되지도 않는다. 그러나 권재상의 작업에는 두께와 무게가 부여된 디지털 픽셀이 자리하고 있다. 우리의 촉각을 비롯한 오감과 직접 접촉하지 않을 뿐, 자신만의 장소와 신체를 지닌 픽셀이다. 빠르게 생성되고 복제되며 휘발되는 매체이지만, 작가의 작업 안에서 픽셀은 ‘빛’이라는 매개를 통해 우리의 눈과 부딪히는 구체적인 물체로 구현된다. 비록 스크린 속 물리적인 공간을 완전히 공유할 수는 없을지라도, 작가가 빚어낸 픽셀의 유기체는 분명한 밀도로 우리와 대면하고 있다.
파편화된 이미지들, 무엇을 그린 것인지, 지워낸 것인지, 혹은 쌓아 올리거나 깎아낸 것인지 직관적으로 가늠하기란 불가능하다. 작가 유호성의 작업이다. 누군가에게 전해 들었던 사건의 잔상. 비록 지금 그 실체는 남아 있지 않지만, 관람객은 전시장 안에 설치된 작품과 캡션을 번갈아 바라보며 흩어진 단서들을 조심스럽게 수집한다. 그가 만들어낸 이미지 뒤에는 분명 설명 가능한 장면과 사건이 있었다. 그러나 전시장 표면에 드러난 결과물에서 구체적인 도상은 정제되어 있다. 화면은 그저 어떠한 물질, 혹은 묵직한 지층처럼, 혹은 메마르고 갈라진 대지처럼 굳건히 고여 있을 뿐이다. 작가가 목격하고 길어 올린 그날의 장면은 틈새 사이로 은밀하게 비치는 어떠한 색채, 그리고 캡션에 박제된 최소한의 단서 속에서만 희미하게 발견된다. 아주 작고 소박한 이 단서들은 역설적으로 그곳에 무언가 분명히 살아 숨 쉬고 있었음을 증언한다. 어쩌면 이러한 어긋남 속에서도 가능한 만남이 있을 것 같다. 비록 손 끝은 닿지 않더라도, 우리에게 가닿은 흔적과 단편들은 어제와 오늘을 연결하는 하나의 포털(Portal)로 작동되고 있다.
일렁이며 우글거리는 패턴 사이로 풍경과 인물이 서서히 모습을 드러낸다. 그것이 스스로를 감추기 위한 위장인지, 혹은 화면을 지배하는 무늬에 동화된 결과인지는 가늠하기 어렵다. 문명의 흔적이 소거된 화면 속에서, 어떤 장면은 풍경과 인간의 경계조차 구분되지 않을 정도로 희미하게 바래 있다. 야자수가 늘어선 이국적인 장면, 거대한 자연의 원시성이 요동치는 풍경, 그리고 그 안에 있는 인물. 표재윤의 작업은 마치 파편화된 신화의 한 챕터나 흩어진 서사의 단편들을 마주하는 듯한 인상을 준다. 전시장을 휘감는 일정한 패턴과 독특한 필치는 모든 작업을 하나의 궤적으로 묶어낸다. 단 하나의 선으로 정교하게 엮어낸 듯한 이 패턴들은 화면 속 요소들이 서로를 지탱하고 연결하도록 만드는 유기적인 도구가 된다. 어떤 면에서 그의 작업은 인간의 눈이 아닌, 우리와는 전혀 다른 비인간 존재의 ‘일인칭 시점’을 빌려온 것일지도 모른다. 이는 단순히 빛을 통해 안구에 맺히는 수동적인 상(Image)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세포를 갱신하며 살아 움직이는 존재의 능동적인 갈망을 포착한 장면에 가깝다. 태초의 기원이자 원시적인 기도처럼, 작가의 회화에는 오늘날 마주한 시대적 징후를 거름 삼아 끈질기게 이어나가고자 하는 '지속'과 '생존'의 염원이 깊숙이 아로새겨져 있다.
3 기다림
본래 기다린다는 것은 도래할 무언가에 대한 기대감을 동반하며, 유예된 시공간을 능동적으로 살아내는 허용과 수용의 태도였다. 때로는 소모와 지루함이 따르기도 하지만, 예측할 수 없는 무질서 속에서 매 순간 설렘과 가능성을 품게 하는 '엔트로피의 기다림' 또한 존재했다. 통신 기기가 개인의 완전한 소유물이 되기 이전, 미디어가 최소한의 공공성과 물리적 거리감을 유지했던 시절에 기다림은 시간의 미덕이자 호기심의 영역을 무한히 팽창시키는 매개였다. 그러나 모든 것에 명확한 디지털 좌표와 즉각적인 동기화가 요구되는 지금의 우리에게, 지연된 시간은 곧 공포이자 도태로 여겨지곤 한다. 이제 우리는 기다리지 못한다. 속도의 궤도에서 벗어난 일말의 가능성과 삶의 여백은, 이 효율의 세계에서 더 이상 쓸모없는 불량품으로 전락하고 있다. 이번 전시에 참여한 작가들은 맹렬하게 휘발되어 가는 세계 속에서 각자만의 고유한 대면을 제안한다. 디지털 픽셀에 두께와 무게를 부여하여 비물질을 물질화하고(권재상), 사라지고 지나간 것들의 파편을 지층처럼 쌓아 올리며(유호성), 고정되지 않은 유기적 패턴을 통해 손에 잡히지 않는 기원에 형태를 주입한다(표재윤). 이는 소진되어 버린 기다림의 시간을 지금, 여기로 다시 소환하려는 하나의 염원이다. 고정되지 않고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무형의 의미와 가능성을 건져 올리는 일. 그것은 맹목적으로 목적과 성과만을 향해 질주하는 효율의 시대에 잠시 제동을 걸고, 지연과 변화라는 '과정' 자체를 온전히 껴안으려는 태도로 다가온다. 이들이 만들어낸 비틀어지고 어긋난 틈새에서는 다시금 많은 것들을 포용할 수 있는 기다림의 부피가 피어오르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