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oho Park박소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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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RITICISM & PREFACES

가장 미끄러운 기념비

1 항체

생물학적으로 병균과 면역체계를 인지한 것은 언제부터였을까? 인류의 기나긴 의학의 역사를 거슬러 추적하다 보면, 보이지 않는 미시적인 위협에 최초로 좌표가 찍히는 특정 구간들과 마주하게 된다. 지역과 문화권에 따라 그 시기와 양상은 달랐지만, '감염'이라는 현상은 언제나 인간의 가장 원초적인 공포를 자극해 왔다. 그것은 시각적으로 포착되지 않기에 더욱 기형적이고 거대한 두려움을 낳았으며, 아주 오랜 시간 동안 인류의 생존과 일상을 송두리째 뒤흔드는 위협적인 대상으로 인지되어 왔다. 외부의 이물질이 나의 내부로 침투하여 나를 파괴한다는 감각은, 자아의 경계를 허무는 가장 끔찍한 파괴의 단상이었기 때문이다. 감염이라는 침투에 대항하는 면역은 '타자의 흔적'을 전제로 성립된다. 순수한 자아란 존재하지 않으며, 몸은 태어나는 순간부터 이미 무수한 타자와의 접촉과 연결로 구성되어 있다. 인류는 질병을 명명하고 분류함으로써 역설적으로 죽음을 일상적인 현상이 아닌 통제 가능한 대상으로 만들고자 했다. 그러나 그 통제의 언어가 정교해질수록, 우리는 오히려 '죽음의 발명'이라는 가장 거대한 환상 앞에 무릎을 꿇게 된다.

2 침투와 전이

작가 이민재는 미술사의 오랜 시간 동안 지위를 누려온 단단하고 안정적인 매체인 캔버스와 나무 패널을 통해 관계의 흔적을 기록하면서도, 이와 대비되는 '비누'라는 지극히 이질적이고 불안정한 물성을 작업의 매체로 새롭게 끌어들였다. 캔버스와 나무가 안료를 단단히 붙잡아두어 유기체와 세포, 떠도는 감정의 잔해들을 박제할 수 있는 견고한 토대라면, 비누는 '사라짐'과 '마모'를 전제하는 일종의 소모품이다. 불을 머금고 녹아내리는 초처럼, 비누는 물과 마찰하는 순간부터 끊임없이 자신의 살점을 깎아내며 어떠한 형체조차 남기지 않는다. 이토록 연약한 비누의 표면 위에 무언가를 그리고 새기는 것은 그 자체로 고도의 집중을 요하는 일종의 퍼포먼스로 인지된다. 작가의 손끝에서 이미지는 캔버스와 나무라는 안정된 지지체 위를 맴돌다가도, 이내 이미지를 끝내 밀어내는 비누 위에서 지속적으로 소모되는 시간과 물질 속으로 기꺼이 녹아내린다. 매끄러운 캔버스와 단단한 나뭇결, 그리고 마모되는 비누의 표면을 교차하며 매만지는 이러한 과정은, 형태와 모양을 보존하기 위한 행위이자 오염을 씻어내기 위한 소멸의 과정 모두를 수반한다. 이 불확실한 경계에서 캔버스와 나무, 비누는 단순한 도구를 넘어, 끊임없이 전이되고 분리되는 생물의 지속 방식을 은유하는 기념비로 작동한다. 이러한 관점으로 교차되는 병과 면역의 개념은 사회적, 개인적 관계망으로 확장되어 표현된다. 국가나 기관은 선전, 공익, 공공의 이름으로 끊임없이 위생을 강조하고 질병을 타자화하며 통제하려 하지만, 작가의 시선에서 질병은 물리적인 침투만 발생하지 않는다. 인간 사회에서 이루어지는 넓은 의미의 관계, 타인과 밀접하게 닿아 체온을 나누는 사랑조차 작가에게는 일종의 질병으로 이해된다. 누군가에게 물들고, 열병을 앓으며, 끝내 자아의 면역체계를 무너뜨려 상처를 남길 수 있는 사랑의 속성은 바이러스의 침투와 자연스레 조응한다. 흔적 없이 사라지는 것은 비누만이 아니다. 사랑도, 자아도, 끝내 흔적의 형태로만 남는다. 작가 이민재에게 질병은 존재하는 모든 것들에 깃든 절대적인 현상이다.

3 미끄러운 관계

질병이 육체를 소진하듯, 시간은 기억을 갉아먹는다. 작가는 파킨슨병이나 알츠하이머처럼 신경계를 파괴하고 존엄과 기억을 서서히 지워나가는 질병을 각인의 이미지와 교차시킨다. 뇌세포가 소실되며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내가 단절되는 이 잔혹한 병리적 현상은, 비누가 물에 닿아 자신의 부피를 잃어버리는 마모의 과정과 닮아 있다. 이런 맥락에서 작가의 작업은 전통적인 회화보다 판화의 속성과 맞닿아 있다. 형태로 맺혀 있다. 그는 영화에서 포착한 장면이나 넓은 범주의 일상에서 수집한 다양한 군상의 관계를 다양한 속의 화면에 새겨 넣는다. 형태는 온전하게 남기를 거부하고 끊임없이 붕괴를 예고한다. 이 과정에는 작가의 치열한 고군분투가 투영된다. 판화처럼 프레임을 활용해 찍어내는 기계적 공정을 거치지 않기에, 미끄러운 표면에서 끝끝내 형태를 유지하려는 손끝의 미세한 악력과 이미지를 안착시키기 위한 집요한 노동이 수반된다. 깎아내려는 자의 의지와 미끄러져 벗어나려는 매체 사이의 팽팽한 긴장감은, 희미해져 가는 기억을 붙잡으려는 몸부림을 묵묵히 드러내고 있다.

사회를 둘러싼 시각 환경과 미디어 생태계 역시 이 비누의 운명과 다르지 않다. 매체를 통해 끊임없이 쏟아지는 상업 영화, 거리의 화려한 광고, 모바일의 바다를 부유하는 수많은 디지털 이미지들은 강한 휘발성을 지닌다. 손가락의 가벼운 스와이프 한 번으로 전환되는 자극적인 잔상은 우리의 망막을 쉴 새 없이 침투한다. 우리는 이 가볍고 휘발되는 것을 마주하며 시각적 쾌락을 탐하지만, 뿌리내리지 못한 채 거품처럼 사라져 버린다. 하나의 이미지가 우리에게 온전히 도달하기 전에, 이미 다른 이미지가 그 자리를 무자비하게 대체해 버리고 만다. 이 무한한 복제와 폐기의 굴레 속에서, 우리는 무엇을 보고 느끼는지조차 망각하는 감각의 마비 상태에 이른다. 무언가를 소유하고 간직하려는 갈망조차 자본주의의 속도전에 휘말려 증발해 버린 지 오래다. 우리는 이 거대한 세계 속에서 단지 한 줌의 재로 소진되기 위해 존재하는 슬픈 연료들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작가가 마모되는 비누 위에 이미지를 새기는 이유는 분명하다. 자크 데리다(Jacques Derrida)의 언어1를 빌리자면, 이민재가 새기는 것은 완성된 이미지가 아니라 '흔적의 가능성' 그 자체일 것이다. 애초에 영원할 수 없다면, 소멸을 긍정하는 가운데 남겨지는 잔여물들에 주목한다는 일종의 선언이다. 비누가 녹아 사라진 자리에는 필연적으로 향기가 남는다. 시각적인 형체는 물에 씻겨 하수구로 흘러가 버리더라도, 후각을 맴도는 보이지 않는 잔향은 공기 중에 흩어져 누군가의 호흡 속으로 스며든다. 무너지고 소진되는 과정 속에서도 기어이 향기를 내뿜으며 부서지는 것. 그것이 바로 죽음이라는 필멸의 저주를 안고 살아가는 우리의 군상이자 자화상이다. 끝내 마모되어 흔적조차 남지 않을 것을 알면서도, 매 순간 타인의 곁에서 온기를 나누고 서로의 삶에 각인되기를 주저하지 않는 인간의 생은 시리고 애처롭다. 모든 것이 거품처럼 증발해 버리는 소진의 시대에서 작가 이민재의 비누는 사라짐을 포용하는 관계, 서늘한 연민의 기념비를 세워내고 있다.

주석

  1. 자크 데리다(Jacques Derrida, 1930-2004)는 그의 저작 『그라마톨로지(De la grammatologie)』(1967) 및 이후 텍스트들에서 '흔적(trace)' 개념을 중심으로 현존(presence)의 형이상학을 해체한다. 데리다에게 흔적이란 단순히 무언가가 지나간 자리에 남겨진 잔재가 아니라, 애초에 '현존'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 자체가 흔적의 구조 위에서만 성립한다는 역설적 논리를 함축한다. 즉, 현존은 언제나 이미 부재의 흔적을 통해서만 자신을 드러낸다. 이러한 맥락에서 '원흔적(archi-trace)'은 기원의 순수성이란 환상임을 폭로하며, 모든 의미는 차이와 지연의 운동인 '차연(différance)' 속에서만 생성된다고 데리다는 주장한다. 이민재가 비누라는 소멸하는 매체 위에 이미지를 새기는 행위는 이 논리를 물성의 차원에서 체현한다. 비누 위의 이미지는 완결된 현존으로 도달하기 이전에 이미 마모와 해체의 과정에 놓여 있으며, 그 형태가 사라진 이후에야 비로소 잔향과 기억이라는 '흔적의 흔적'으로 존재하게 된다. 데리다적 의미에서 이 작업은 현존의 완성을 목표로 하지 않고, 소멸의 운동 그 자체를 의미 생성의 조건으로 삼는다는 점에서, 재현(representation)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내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