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빛 너울
《살빛 너울》 · 예술공간 의식주 · 2025.04.26–05.11
서울시 서대문구 홍연길 80 2층
몸
우리는 오래전부터 복잡한 신체를 통해 이루어지는 폭력의 현장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이 유기체 덩어리는 생태계의 테두리 안에 속해 있기에 피해와 가해의 장소에서 영원히 해방될 수 없을 것이다. 우리는 공동체를 통해 이 파괴의 현장을 최소화하기 위해 다양한 방법들을 모색해 왔다. 하지만, 여전히, 폭력적인 우리의 입은 쉴 새 없이 가장 멀리, 가장 넓은 범위에 이르기까지 날카로운 언어들을 퍼트리고 있다. 이와 함께 음식을 섭취하고 자원을 채굴하기 위해 많은 것들을 태워 버린다. 채소와 식물, 동물과 생명의 시간을 빼앗아 가며 살아가는 정점의 포식자이다. 동시에 애석하게도 우리가 지닌 능력과 감정은 사회와 조직을 위해 기꺼이 헌납된다.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건설해 온 가장 상위 포식자로써 군림하게 된 공동체 안에서 우리는 위계의 상아탑에 각자의 취향과 이름을 약탈당하는 피해자다.
우리의 몸에는 폭력을 자행하고 받아내는 두 개의 붉은 핏줄이 있다. 이 벌건 액체가 순환되고 숨이 지속될수록 수많은 사건과 사고가 양산된다. 가장 가까운 이와의 갈등부터 드넓은 세상 속에서의 고군분투, 그리고 끝내 스스로에게 돌려지는 화살의 방향까지, 마음과 정서에 새겨지는 크고 작은 상처들은 언제나 우리의 몸을 파고든다. 시간은 언제나 뒤돌아볼 틈을 주지 않기에 이 여러 겹의 상흔과 푸른 단서들은 점차 깊고 짙은 너울을 만들어낸다. 특히, 가장 바깥에 있는 가냘픈 피부는 붉은 폭력의 현장을 고스란히 담아낸다. 크기와 관계없이 생에서 일어난 압력의 흔적, 섭취와 약탈의 단서들이 스며있다. 알 수 없는 힘으로 새겨진 크거나 작은 흉터, 노화의 길로 이끄는 태양이 만들어낸 주름, 장신구들이 지나간 구멍, 그리고 실핏줄이 터져 만들어진 푸른 멍은 여전히 뼈와 내장, 근육을 감싸고 있는 가장 바깥의 피부에 수많은 가해와 피해의 서사가 함께 봉인되어 있다.
통증
얇은 실과 실이 엮여 만들어낸 살구색 피부 위로 붉고도 푸르른 멍울이 솟아난다. 둥글고 부드러운 곡선, 고운 모래 결과 유사한 표면 위로 짙고 푸르스름한 색이 알알이 박혀있다. 정갈한 머리칼, 소박한 반짝임이 화면을 수놓고 있다. 작가 박진주의 화면에는 인간이라면 누구나 겪어야 하는 피부층 아래의 상흔이 주로 포착된다. 갈라진 피부 사이로 드러나는 손의 속살, 어디에서 어떠한 경로로 얻은 것인지 모를 크고 작은 멍, 연약한 귀의 살을 뚫고 지나가는 은색 피어싱, 한 번 지워진 문신 자국이 투명하게 비치는 얇은 견직 위에 새겨져 있다. 이 아픔과 통증의 이미지들은 보는 이의 눈을 화면에서 오랫동안 떠나지 못하게 붙잡아 둔다. 무릎, 손과 발, 그리고 살결 어딘가의 크고 작은 상처들은 측은한 마음이 들게 하지만, 우리가 지닌 피부 아래 어떤 것이 흐르고 머물러 있는지를 다시금 깨닫게 한다. 그의 화면에서 바탕이 되고 지지가 되는 견(비단)은 전통 채색화의 바탕 재료로 오랫동안 활용되어 왔다. 한지처럼 촘촘하지 않은 견은 직물의 사이 공간이 다소 넓어 상대적으로 투명성을 가지는 지지체이다. 왕의 초상을 비롯하여 중요한 인물을 기록할 목적으로 사용되어 왔던 견화는 포수라고 하는 밑 작업이 진행된 후, 채색을 거쳐 종이를 덧대는 배접 작업을 마무리로 완성된다. 이러한 전통적인 방식은 색채와 발색을 더욱 도드라지게 한다. 하지만, 작가 박진주는 이와는 반대로 포수와 배접의 과정을 거치지 않고, 견이 가지고 있는 투명한 성질을 그대로 드러낸다. 아마도 이것은 우리가 겪어내야 하는 통증과 고통의 기억을 고스란히 비추어내는 살갗을 가장 적절하게 은유하기 위한 필연적인 선택이었을 것이다. 이 얇고 투명한, 그러나 생의 두터운 기록을 담고 있는 살갗 속에는 퍼렇고 영롱한 통증의 서사가 스며들어 있다.
살빛 아래, 멍울
나와 너의 살이 겹친다. 나와 너의 멍울이 겹친다. 나와 너의 그림자가 겹친다. 우리가 모두 겪어 왔던, 그리고 앞으로 겪어야 하는 피부 아래의 물리적인 압력의 증거들이 작가 박진주의 손을 통해 재현된다. 그러나 그의 화면에서는 신경계가 전달하는 통증의 기억과 더불어 아스라이 흐르는 회복의 단상이 함께 피어오른다. 들어오는 빛을 튕겨내지 않고, 자신의 표면을 통과하게 한다. 그림자와 빛, 밤과 낮, 고통과 회복, 창백함과 온화함이 동시에 깃들 수 있는 교집합의 영역을 만들어낸다. 그는 붓을 사용하는 것을 자신의 살결을 쓰다듬는 행위라고 표현한다. 모필이 가진 가늘고 긴 털의 뭉치는 예민하고 유연한 손짓을 통해 결코 사라질 수 없는 불안과 침묵으로 인해 만들어진 어둡고 깊은 골짜기에 재생의 손길을 건넨다. 박진주의 작업은 어느 한쪽으로 치우쳐있지 않는다. 자신의 피부에 새겨진 고통의 단상을 토로하는 한 가지 목적으로, 또는 회복과 치유의 종착을 기원하는 또 한 가지의 목적으로 치닫지 않는다. 그래서 그의 작업은 한 사람의 인물을 기록하고 기리는 초상이 아니다. 가해와 피해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는 우리의 군상을 그려내고 있으며, 이면과 양면을 동시에 펼쳐내고 희극과 비극이 교차하는 아련한 기록이다. 푸른 겨울의 눈발과 붉은 봄의 꽃눈이 내려앉는 감각의 광장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