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mall Talk
《Small Talk》 · 예술공간 의식주 · 2025.05.17–06.01
서울시 서대문구 홍연길 80 2층
1. 기차와 나비
언어는 본디 움직이는 것이었다. 바람에 흩날리고, 입술 사이를 스치며 사라지는 숨결이자, 기억과 망각 사이에서 아슬하게 매달린 진동이었다. 인간은 이 휘발되는 소리를 붙잡기 위해 문자를 만들어냈다. 기호를 통해 말은 종이에 내려앉고, 시간은 기록될 수 있게 되었다. 문자는 단지 소리를 붙잡는 도구가 아니라, 세계를 바라보는 틀이며 삶을 조직하는 질서의 도입이었다.
말을 배우기 시작한 아이의 방 한편에는 커다란 포스터가 걸려 있다. 그 위에는 기차, 나비, 바나나, 그리고 자음과 모음의 도형들이 나열되어 있다. 아이는 이 이미지와 텍스트를 동시에 바라보며 언어의 세계에 입문한다. 구체적인 것과 추상적인 것 사이에서, 아이는 이 세계가 기호의 약속으로 짜여 있다는 사실을 체득한다. 이 학습은 ‘언어를 배운다’는 것을 넘어, 세계를 나누고 구획하며 질서를 부여하는 하나의 정치적 행위이기도 하다. 엄마와 아빠, 여자와 남자, 숲과 나무, 그리고 바나나의 노란색과 나비의 날갯짓 등 많은 감각이 이미지와 텍스트의 결합 안에서 일정한 코드로 정리된다. 이처럼 언어의 세계는 소박한 이미지와 감각을 통해 아이의 몸에 각인되며, 사회적 존재로의 통과의례를 수행하게 한다. 그러나 아이는 점차 언어의 기능과 기호적 측면에 기대어 자신에게 내재된 자유로운 상상과 꿈을 최소화한다. 그렇게 우리는 어른이 되었다. 강력한 약속을 지켜내는 견고한 사회의 구성원이 되었다.
작가 박행복은 이번 전시 ‘Small Talk’에서 언어와 문자의 기능적 측면을 벗어나는 시도를 한다. 그는 의미를 고정하기 이전의 언어, 그리고 의미가 소멸한 이후의 언어를 탐색한다. 그림과 말이 서로를 가로지르며 섞이고 흐르는 그 경계 지점에서 자신의 회화를 구축한다. 이는 기호가 질서를 부여하기 이전, 자유롭고 유동적이었던 언어의 본래 모습을 다시 불러내려는 시도이다.
2. 그리는 즐거움
박행복은 그동안의 작업에서 시간과 일상의 단편을 붙잡아 그리는 일을 해왔다. ‘타임라인 드로잉’, ‘메트로 페인팅’ 같은 작업은 단순한 기록을 넘어, 시간 자체를 회화의 물질로 삼으려는 시도였다. 하루를 통과하며 스며든 기호와 감정들은 그림이라는 공간 안에서 다시 흘러가고 번져나갔다. 이때의 시간은 직선으로 나아가지 않는다. 오히려 맴돌고 돌아오며, 순환하는 리듬을 따라 미세한 떨림을 만들어낸다. 박행복의 회화는 그러한 떨림, 흐름과 반복 속에서 길어 올려진 시간의 발자국이다.
이전까지의 그의 작업이 시간의 흐름을 연결해 드러내는 것에서 출발했다면, 이번 전시에서는 말과 문자, 이미지가 서로를 가볍게 건드리고 부드럽게 스며드는 순간들을 보여준다. 전시 제목 'Small Talk'에 등장하는 ‘Small’은, 의식주 공간으로 올라가는 계단에 그려진 ‘스멀스멀 (Small Small)’이라는 작업에도 포함되는 단어다. 영어와 한글을 넘나드는 이 말장난은 단순한 재미를 넘어, 두 언어 사이의 리듬과 의미를 교차한다. 'Small'과 '스멀스멀'은 발음의 유사함을 가볍게 끌어안으면서도, 서로 다른 결을 품고 있다. 작음이라는 감각과, 은은하게 번지는 감촉은 두 단어를 통해 조용히 교차하고, 그림 위에서 가볍게 포개어진다. 곧이어 전시장에 들어서면 보이는 몇몇 작업에서는 텍스트의 의미가 흐릿해진다. 실수에 의해 만들어진 작업 <햄행>, ‘올굳’을 뒤집어서 그린 ‘돈룽’은 의미가 없거나 그리는 과정에서 파생된 새로운 패턴의 이미지들이다. 이 문자들은 작업의 과정에서 어떠한 우연적인 착시가—‘행’을 썼지만, ‘햄’으로 보이는—유발 되거나, 색과 형태를 변주시키는 과정에서 만들어진 작업이다. 본래 정해진 언어라는 기호, 그리고 약속의 문자들 안에서 시작되었지만, 작가 박행복은 두 가지 의미를 교차하여 위트를 만들거나 실수와 변주를 허용하여 아직 무의미한 것들이 만들어내는 미완결의 가능성을 펼쳐낸다. 이는 창작자와 관객이 전시 공간에서 만나 서로의 상상 영역을 교류하고 정지되어 있지 않은 과정의 세계에 함께 있음을 인지하게 한다. 작가의 작업실에서 피어난 ‘그리는 즐거움’은 비로소 전시장의 관객들에게 스며들게 되는 것이다. 관객은 직접적으로 그리는 순간을 목격할 수 없지만, 텍스트와 이미지가 주고받는 작은 농담과 숨을 따라가며, 그의 즐거운 손끝을 간접적으로 느낄 수 있게 된다. 이곳에 펼쳐진 이 작은 도형들은 디자인, 회화, 텍스트의 경계를 넘나들지만, 그 어떤 규칙에도 머물지 않는다. 스멀스멀 퍼지는 선들, 소리 없이 쌓이는 색과 형태들. 그곳에는 박행복이 그려낸 작은 웃음과, 작게 스며드는 대화들이 가득하다.
3. 작은 말
아침에 눈을 떠 이불을 개고, 집 안에 쌓인 먼지를 털고, 찻물을 끓이며 시작되는 하루는 너무도 익숙해 쉽게 망각된다. 그러나 이러한 반복되는 일상이야말로 우리가 소리 없이 기댄 삶의 구조이자, 사라질 때 비로소 선명해지는 그리움의 원형이다. 박행복은 이 ‘작은 사건, 작은 언어’의 층위에 주목한다. 반복과 사소함, 익숙함 속에 숨겨진 정서의 모양을 포착하고, 그것을 언어와 회화로 끌어올린다. 그는 명확한 지시 대상을 가진 단어보다는, 추상적인 개념어—예컨대 '행복' 같은—를 선택해, 그것이 품고 있는 언어적 흔들림과 잔향을 퍼트린다. "행복의 사전적 정의: 복된 좋은 운수." 그러나 그런 명료한 정의는 작가의 회화 안에서 무너진다. 작위적이고 비효율적인, 그러나 감각적이며 시적인 붓질 속에서, ‘행복’은 무수한 층위의 감각으로 해체되고 재조립되고 있다.
예술공간 의식주의 물리적 공간에 배치된 작품은 마치 도면처럼 치밀하게 설계된 듯 보인다. 그러나 그 설계는 늘 열려 있고, 작가의 손끝에서 태어난 말과 이미지가 그 위를 유영한다. 마스킹 테이프 없이 그려낸 문자의 그리드는 미묘하게 어긋나 있는 작은 반란이며, 다시 감각을 되돌아보게 하는 열린 문으로 기능한다. 가장 기본적인 붓질과 가장 단순한 단어들, 그러나 그 속에 담긴 무수한 감각과 태도들. 박행복의 'Small Talk'는 결국, 언어 이전의 언어, 말 이전의 말, 이미지 이전의 감각으로 되돌아가고자 하는 시도이다. 느리고 세밀한 관찰을 통해 ‘그리는 것’의 질문들을 파생하고 있다. 이곳에서 이루어지는 대화는 주고받는 이가 따로 정해져 있지 않다. 작고, 느린 말, 즐겁고 행복한 어휘와 이미지들이 뒤섞여 매번 새로운 가능성과 여백을 만들어낸다. 그가 만들어낸 소박한 말과 그림은 어떤 방향으로든 갈 수 있는 자유로운 유람을 허락하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