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oho Park박소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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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RITICISM & PREFACES

하얀 땅을 걷는 투명한 무지개

《하얀 땅을 걷는 투명한 무지개》 · 예술공간 의식주 · 2024.05.11–05.26

서울시 서대문구 홍연길 80 2층

기획 및 글: 박소호

어떤 만남

아침을 맞이하는 따듯한 커피, 어느덧 훌쩍 자라 버린 머리카락, 추위가 떠나 완연한 온기가 다가올 때 우리는 시간과 마주하게 된다. 때때로 이 시간은 우리에게 어떤 이별과 어떤 만남을 주선한다. 예기치 못한 사고로 작은 생명의 시간이 끝나고, 또 다른 사건으로 새로운 시간이 잉태된다. 설계와 계획은 이 거대한 흐름 앞에서 아무런 힘이 없다. 문득, 불현듯, 갑자기 찾아오는 불의의 현장은 많은 것을 앗아간다. 이 불안의 시공간에서 우리의 눈은 시간의 반대방향으로 흐른다. 손에 쥔 온기는 이내 차갑게 변하고, 차가웠던 머리가 뜨겁게 달궈지기도 한다. 더욱이 우리가 시간의 흐름 속에서 조응하는 신체반응은 계절감각에 둘러싸여 있다. 바람과 하늘과 땅이 주는 온도는 몸의 감각을 사로잡는다. 이내 정신에 깃든 수많은 감정 신호는 수동적으로 반응하게 된다. 쌀쌀한 바람이 불기 시작하면 근육이 움추러들고 신경은 경직된다. 한 없이 뜨거운 여름이 다가오면 수많은 감각이 이완되어 몸은 늘어지고 활동은 점차 둔화된다. 이 보편적인 계절과 반응을 깨트리는 불현듯 반갑게 다가오는 만남이 있다. 이 만남은 우리의 눈을 응시의 공간으로 초대한다.

시간을 멈추는 장면

스스로 온전하게 결정할 수 있는 것은 많지 않다. 사회, 도시, 지역 등 인간은 많은 이들과 함께하는 커뮤니티 안에서 생존해야 하기에 항상 공공의 이익과 선을 향에 나아간다. 그리고 문명과 사회는 항상 거대한 자연재해 앞에서 무력하게 무너지곤 한다. 더더욱 작디작은 나, 개별자에게 ‘선택’은 판타지 소설처럼 대부분 내일에 대한 상상이 되어 휘발된다. 수경은 복잡한 구조로 얽힌 이 세계의 신경망 안에서 잠시 멈춤을 시도한다. 몰입과 집중을 통해 주변에 보이는 얇은 이미지들을 사라지게 하고 오로지 한 장면과 소리에 감각을 몰아넣는다. 수집한 공기와 온도는 주변에서 마주하기 쉬운 일상의 단편이다. 지나치기 쉽고 시선에 들어오지 않는 그런 보편적인 장면을 섬세한 묘사와 표현으로 재현한다. 흐름보다는 순간에 치중하고 찰나와 같은 공간에 스스로의 눈을 포갠다. 무엇이 이토록 작가를 붙들어 놓는 것일까. 걷다가 마주치는 작은 풀숲, 창가에서 내려다보는 겨울풍경, 비가 온 뒤에 만개하는 장미의 이슬은 아쉽게 흘러가는 오늘을 잠시 멈추게 한다.

안개가 걷이고 나면

거칠지만 담백한 표면을 담고 있는 한지, 그리고 스미고 물들기 적합한 안료, 사실적으로 묘사된 장면 위를 수놓는 가는 터치, 수경의 화면은 이 세 가지 층으로 겹쳐진다. 우리가 알고 있는 사실화와 다르게 작가는 밀도 높은 재현과 기법 위에 주관적인 해석을 가미한다. 이 화면에는 물기가 가득하다. 꽃잎과 풀잎 사이로 흐르는 촉촉한 이슬은 누군가에게 보내는 한 방울의 편지로 다가온다. 장지에 극사실 회화를 올리는 것은 극히 드물다. 극사실화은 통상적으로 팽팽하고 견고한 캔버스 위에 밀도와 점성이 높은 유화나 아크릴 물감을 선택하는 것이 효율적이다. 그러나 작가는 한국화에서 주로 사용되는 여러 겹의 한지를 겹쳐 만든 장지를 사용한다. 선택과 결정으로 만들어진 아주 옅은 채색들이 몇 겁의 장지 아래 침전했을 것이다. 덕분에 풍경의 질감은 다소 가는 사포와 얇은 모래알처럼 지나치는 시선의 바람과 물기를 잡아내기에 적절해졌다. 작가는 이를 통해 보편적인 사물에 새로운 이름을 새긴다. 그가 건네온 풍경은 비에 젖어 축축 하지만 맑게 개인 내일을 상상하게 하고, 눈이 내려 춥고 경직되어 있지만 초록이 만개할 땅을 연민하게 된다.

낮은 곳으로 내리는 눈

많은 이들이 높은 곳에 주거하게 된 이 도시에서 높이에 대한 감각은 상대적으로 다가온다. 계단과 엘리베이터는 우리의 시선을 보다 높은 곳으로 끌어올린다. 오랫동안 우리의 발을 지탱해 주었던 땅은 점차 발아래, 저 깊은 곳으로 침전되고 있다. 수경이 재현한 풍경은 대부분 시선 아래에 있다. 땅과 실개천은 바로 우리 발아래에서 우리를 받치는 단단한 지지대이다. 땅은 우리가 두 다리로 서있게 하고, 때로는 우리의 두 다리를 붙들거나 쓰러지게 하기도 한다. 계획할 수 없는 시간의 흐름과 굴레 속에서 수경은 하염없이 내리는 겨울의 눈과 얼마 지나지 않아 증발될 이슬이 깃든 자연물에게 시선을 둔다. 누구나 볼 수 있고 감각할 수 있는 계절의 대명사를 소재로 삼았지만, 그가 그려낸 눈송이는 차갑지 않고, 눈물처럼 흐르는 이슬의 방울은 습하지 않다. 오히려 따듯한 겨울, 시원한 여름의 감각을 일깨우게 한다. 비슷한 장면과 시간처럼 보이는 풍경이 결코 같지 않다는 것을, 그 안에 무수히 많은 사고, 사건, 사연이 걸어가고 있다는 것을 새삼 느끼게 한다. 우리의 눈을 가리고 있는 수동적인 이미지를 걷어내는, 수경의 화면은 시각의 안개를 사라지게 하는 몰입과 정착의 무지개를 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