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가지 물을 따라
《세 가지 물을 따라》 · 예술공간 의식주 · 2026.09.02–09.13
서울시 서대문구 홍연길 80 2층
도도트래블그렌트
협력기획: 강다원
주관·주최: 예술공간 의식주
후원: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시각예술 창작주체 지원사업, 시각예술가 김선우
리서치는 지나간 것을 되짚고, 다시 탐색하는 행위이다. 한 번의 관찰로 마무리되지 않고 되돌아가 살피는 과정을 의미한다. 여행 역시 하나의 목적지에 도달하는 사건이 아니라, 그 여정에 쌓이는 시간과 기록, 끊임없는 탐색으로 이루어진다. 리서치와 여행은 이 지점에서 만난다. 두 개념 모두 '도착'이 아니라 '이동' 그 자체와 그 흔적을 다루기 때문이다.
안세은의 이번 작업은 리서치를 기반으로 도출된 결과물들이다. 작가의 이동 경로 안에서 수집된 이미지와 텍스트가 서로 교차하며 의식주라는 장소에 놓였다. 누구든 작가가 모은 자료를 열람할 수 있다. 각자 가져온 책을 읽어도 좋다. 다만 이 공간에는 바다를 중심으로 수집된 것들이 놓여 있기에 이 안에서 생산되고 연장된 또 다른 상상들은 주로 바다를 향해 있을 것이다. 그렇기에 이 장소는 완결된 결과물이 아니라, 다시 찾는 행위가 계속해서 이어지는 또 하나의 출발점이 된다. 작가가 다루는 이동의 무대는 땅이 아니라 바다다. 바다는 시각적으로 드러나는 것이 적은 공간이며, 심해는 눈으로 확인할 수 없는 미지의 영역을 품고 있다. 땅 위는 사람의 영역이기에 많은 것이 시각적으로 노출되지만, 바다는 그렇지 않다. 사람이 물 위에 머물 수 있는 시간은 고작 몇 초, 몇 분에 불과하며, 이 공간을 지나려면 표면장력을 이용한 이동 수단, 배가 필요하다. 오래전부터 배를 통해 교역이 이루어졌고, 국경이 뚜렷한 육지와 달리 경계가 고정되지 않은 바다는 육지와는 전혀 다른 방식의 이동과 권력의 지형을 형성해 왔다. 작가는 이러한 바다의 경로를 따라 시작과 끝이 정해지지 않은 리서치를 진행했고, 그 여정에서 파생된 이미지와 텍스트, 그리고 연상된 소리를 의식주에 설치했다.
인천항에서 출발한 배는 서쪽으로 뱃머리를 돌려 황해로 들어선다. 대륙과 반도 사이에 갇힌 이 얕은 바다는 오랫동안 교역과 충돌이 오간 항로다. 작가는 이 물길 위에서 질문한다. ‘배는 무엇을 지니고 있을까’ 표면 위를 미끄러지는 듯 보이지만, 표면장력을 딛고 수면의 위아래를 동시에 가로지르는 몸이다. 그 아랫부분에는 균형을 잡기 위한 밸러스트 탱크가 있어 화물 대신 바닷물이 채워진다. 부산에서 실은 물이 싱가포르에서 비워지듯, 배는 화물만이 아니라 바닷물과 그 안의 보이지 않는 생명까지 함께 실어 나른다. 국경 없는 바다 위에서 한 해역의 물은 다른 바다의 생태계를 건드리며 스쳐 지나간다. 이어 작가의 시선은 자연스레 물질로서의 ‘철’로 옮겨간다. 배의 몸체를 이루는 철이 어디서 왔는지 따라가면 황해 연안의 제철소에 닿게 된다. 바다를 건너기 위해 만들어진 철이 다시 바다를 낀 땅에서 제련되어 배가 되고, 그 배가 바다를 가르며 진동한다. 이 순환 속에서 작가는 배의 진동을 몸으로 감각하며 이를 소리로 남기고자 했고, 이는 비교적 오래된 음향 장비인 '플레이트 리버브'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졌다. 얇은 철판이 진동하며 잔향을 입히는 이 오래된 기술은 어쩌면 황해를 가르는 배의 몸체와 닮아 있다. ‘왜 하필 이 과거의 장비인가’라는 질문은 여전히 진행 중이며, 그 질문 자체가 리서치를 이끄는 동력이 되는 듯 하다. 소청도로 향하는 배 안에서 작가는 다시 철에 머리를 기댄다. 표면이 아니라 그 아래, 물리적으로 바다를 오르내리는 감각. 황해 한가운데 놓인 이 작은 섬은 오랜 시간의 퇴적이 관찰되는 장소로, 소청도의 지질은 수억 년 전 지구의 시간을 단층 속에 새기고 있다. 발밑의 바위 하나가 이미 깊고 오래된 기록이라는 사실은, 이전의 음을 기억하며 다음 음을 쌓아가는 ‘듣기’의 구조와 교차된다. 그렇게 층층이 쌓인 기억이 시간이라면, 물질에 대한 연구 역시 아직 닿지 못한 기억을 조금씩 연장해 가는 일일지 모른다. 소청도에서 항로를 넓혀, 리서치는 일본 홋카이도의 도카치 강으로 이어진다. 유빙을 보러 나섰던 날, 무심코 뒤돌아본 배의 후미에서 작가는 뜻밖의 장면과 마주쳤다. 연기와 파도가 뒤섞여 굉음을 내는 틈으로 드러난 바다의 형상이 마치 고래의 꼬리처럼 보였던 것이다. 생태계에 폐를 끼치는 거대한 기계 안에서 마주친 자연의 형상. 이 낯선 감각은 강물에서 해수로, 액체에서 고체로 넘나드는 유빙을 통해 ‘경계란 무엇인가’를 다시 묻게 했다. 담수와 해수가 온전히 나뉘지 않는 그 자리에서, 물은 자신이 지나온 시간과 장소의 기억을 품고 흘러들고 있다.
황해에서 소청도를 거쳐 도카치 강까지. 세 장소를 잇는 이 리서치의 항로는 하나의 결론에 도달하기 위한 여정이 아니다. 각 장소의 물은 저마다 다른 속도로 흐르고 얼고 증발하며 상태를 바꾸고, 흔적 속에는 셈할 수 없는 기억과 아득한 과거의 단서들이 실려 있다. 작가는 이 흔적들을 영상과 텍스트, 그리고 철판의 진동에서 길어 올린 사운드로 치환해 의식주라는 공간에 나란히 놓는다. 이곳에 놓인 것들은 완결된 답이 아니라 아직 확정되지 않은 질문들의 파편들이다. 배와 철, 밸러스트 탱크 속의 낯선 물, 유빙 아래 흐르는 강물, 소청도의 오래된 바위. 이 모든 것은 하나의 항로 위에서 우연히 만난 단서이며, 작가는 그것을 조심스럽게, 아직 완성되지 않은 형태로 나열해 둔다. 관객은 이 공간에서 작가가 걸어온 물의 경로를 따라가 볼 수도, 각자의 기억과 질문을 그 위에 겹쳐볼 수도 있다. 리서치가 그러하듯, 여행이 그러하듯, 이 공간 역시 도착이 아니라 다시 떠나기 위한 자리로 남아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