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oho Park박소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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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RITICISM & PREFACES

달의 조건

1. 달의 뒷면, 달의 조건

아폴로 우주선의 달 착륙은 여전히 누군가에게는 맹목적인 믿음과 끝없는 불신 사이를 진동하는 인식론적 문제로 남아 있다. 우리는 달의 표면과 거친 크레이터의 모습을 미디어를 통해서만 간접적으로 경험할 수 있을 뿐이다. 두 발을 딛고 피부로 감각해보지 않고서는 그것을 온전히 보았다고, 혹은 우리가 아는 그 형태로 존재한다고 단정 지을 수 없다. 달을 실제로 경험한 이들은 그곳에 착륙했던 극소수의 우주인뿐이며, 누구도 그 경이로운 장면을 온전히 목격한 적은 없다. 그럼에도 우리는 마치 그것을 직접 본 것처럼 선명하고 구체적으로 기억해낸다. 본다는 행위에 대한 철학적, 현상학적 논의가 오랜 시간이 흐른 지금까지도 끊임없이 이어지는 이유는 바로 이 지점에 있다. 우리는 눈으로 대상을 마주하기 이전에, 이미 텍스트와 학습을 통해 '알고 있다'고 굳게 믿는 방식으로 사물을 규정한다. 그렇기에 처음 마주하는 기이한 형상 앞에서도 종종 이미 어디선가 본 듯한 기호로 환원하려는 충동에 사로잡힌다. 데자뷔, 혹은 기시감이라는 이름의 이 불안은 낯선 것을 온전히 받아들이지 못하는 관성적 인지의 결과물이다. 이는 우리가 얼마나 언어와 텍스트라는 견고한 감옥 안에 갇힌 채 세계를 인식해왔는지를 폭로하는 징후이기도 하다. 임다현은 이 감옥의 문을 맹렬히 두드리며 저항하는 대신, 그 바깥으로 빠져나가는 전혀 다른 차원의 통로로 관객의 시선을 유도한다. 그는 기호에 쉽게 유인되지 않는 이질적인 연결과 관계의 형상들을 공간 위에 조심스럽게 올려놓는다. 우리가 달의 뒷면을 육안으로 확인한 적 없듯, 그의 작업이 집요하게 겨냥하는 것은 보았다고 확신하지만 한 번도 마주한 적 없는 인지의 이면이자 감각의 또 다른 얼굴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작가는 당연하게 여겨온 시각적 기호들이 특정한 규격과 조건에 의해 직조된 환영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파고든다. 단순히 시각을 통해 드러나는 환영이 아니라, 학습으로 만들어진 조건으로서의 이미지를 보여주는 것이다. 작가는 언어와 관습의 장막을 걷어낸 뒤에야 비로소 드러나는 날것의 사물, 그 자체의 조건들을 전시장에 소환하고 있다.

2. 편집된 기호들

일상에서 마주할 수 있는 바게트와 차가운 콘크리트 벽돌이 묘한 긴장감을 품은 채 나란히 놓인 낯선 풍경이 펼쳐진다. 유기물과 무기물, 부드러움과 단단함, 식탁과 건축적 사물들, 소멸하는 것과 영속하는 것이 하나의 시선 안에서 팽팽하게 부딪친다. 가장 주목할 만한 지점은 사물들의 상태가 단순한 '재배열'이 아니라 '재배치'의 차원에 놓여 있다는 사실이다. 배열이 이미 존재하고 합의된 순서를 보기 좋게 조정하는 표면적 행위라면, 배치는 사물이 놓이는 자리와 그 사물이 맺는 관계의 조건 자체를 밑바닥부터 사유하는 구조적 개입을 뜻한다. 임다현에게 재배치란 단순히 좌표 X에서 Y로의 물리적 이동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사물이 지닌 관계의 조건을 다시 묻고 해체하는 끈질긴 과정이다. 따라서 그의 작업 앞에서 어떤 완결된 서사나 고정된 형태를 찾아내려는 시도는 번번이 미끄러지며 무의미해질 수밖에 없다. 공간에 흩뿌려지듯 놓인 오브제들은 그 자체로 닫힌 결론이 아니라, 끝없이 질문을 파생시키는 단서이자 사유의 시작점으로 받아들이는 편이 훨씬 타당하다. 연필과 지우개, 책상과 의자처럼 특정한 실용적 쓰임새에 단단히 묶여 있던 사물들은 작가가 설정한 공간으로 진입하는 순간 본래의 용도를 무참히 벗어던진다. 그것들은 실용성을 탈거한 채, 오직 낯선 방향을 안내하는 순수한 조형적 기호로 전환된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토록 집요한 단서의 나열과 기호의 반복을 통해 궁극적으로 무엇을 획득할 수 있을까. 그것은 텍스트로 결코 환원되지 않는 언어의 외부, 즉 이미지로부터 시작되는 감각의 영역이다. 의미의 경계가 무너진 곳, 애초에 사회가 규정한 구분과 차이가 성립하지 않는 이 무정형의 세계에서 작가는 관객에게 보다 능동적인 지각을 요구한다. 수학이 단순한 연산을 넘어 우주의 체계를 규명하는 일인 것처럼, 임다현에게 재배치란 단순히 조각가적 손의 수련이기 이전에 사물과 공간이 맺는 관계의 체계를 갱신하고 전복하는 일이다. 소리와 형태, 물성과 개념이 뒤섞이는 그 임계점에서 사물은 박제된 정지 화상이 아니라, 흐름 속에서 끊임없이 움직이는 잠재적 상태로 존재하게 된다.

3. 연극으로서의 전시

바게트처럼 보편적인 일상의 상태가 깃든 사물과 미술사적 위치를 지닌 조각. 임다현은 전혀 다른 층위에 속한 이 두 매체를 아무런 위계 없이 동등하게 세움으로써 가벼운 형태적 유희를 넘어선다. 전시 ⟪Hide&Seek⟫에서 신체의 파편화된 도상들은 노란색 캔버스에 그려진 ‘W’ 모양과 병치되어 몸이 지닌 기호적 방향을 가리킨다. 동시에 천장과 맞닿은 가발의 위치는 바닥에 놓인 철제 의자와의 아득한 거리감을 통해 수수께끼 같은 공백을 공간에 새겨 넣는다. 이러한 장치들은 분명한 물리적 실체로 존재하지만, 우리의 빈약한 언어로는 결코 명확하게 특정할 수 없는 인지의 사각지대를 가리키고 있다. 전시 ⟪Missed the Arrival⟫에 설치된 조형물을 살펴보자. 종이처럼 허공을 흩날리는 달의 형상, 신체에서 연장되어 아코디언처럼 기괴하게. 분절되는 형태의 작업들은 우리가 그동안 견고하게 학습해온 기호의 세계관을 교란한다. 그것은 '이것은 무엇이다'라고 선언하기 이전의 날것, 의미화 이전이거나 그 이후에 도래하는 상상의 영역을 건드린다. 작가는 익숙하기에 제대로 응시하지 않는 사물의 형태 안에 관습적 기대를 철저히 붕괴시키는 다른 이면을 슬며시 침투시킨다. 덕분에 우리가 견고하다고 믿어 의심치 않았던 기호적 세계관은 사정없이 충돌하고 어긋난다. 유기물과 무기물, 기호와 사물 등 이질적 이미지가 병치되는 틈새에는 필연적으로 인지의 혼란이 발생하며, 이는 곧 새로운 의미가 잉태되는 혼성의 통로가 된다. 공간에 흩어진 파편화된 단서들은 관객을 낯선 이면으로 이끈다. 어디에도 '작가의 의도는 이것이다'라고 선언하는 마침표는 존재하지 않는다. 언어와 이미지의 충돌, 그리고 보이지 않는 이면과 시선의 관계는 임다현의 작업을 지탱하는 축이다. 이 과정을 '연극'이라는 실시간 경험 매체로 치환해 보면 작품의 내밀한 층위로 수월하게 진입할 수 있다. 작가가 공간에 배치한 사물들을 무대 연출의 장치나 조명, 장막의 관점으로 바라볼 때 비로소 흥미로운 지점들이 모습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영상 매체와 달리, 연극은 무대와 객석 간의 암묵적 약속을 바탕으로 관객에게 실시간의 감각을 요구한다. 서사가 허구임을 모두가 인지하면서도 그 이야기를 떠받치는 사물과 바닥은 물리적 실재로 존재하는 것처럼, 완벽한 재현을 지향하지 않는 무대 장치들이 주변 분위기와 맞물리며 연극은 자연스럽게 실재와 허구가 팽팽하게 공존하는 장이 된다.

임다현의 작업에는 바로 이러한 연극적 장소성과 구조가 깃들어 있다. 그의 전시는 통상적인 관람 방식을 포함하여 기존의 언어와 기호체계가 지닌 의미에 질문을 건넨다. 개별 사물에 담긴 사전적 정의보다 그것이 놓이는 위치, 사물 간의 관계, 공간의 맥락 등을 재구성한다. 이를 통해 작가는 '나와 감각', '나와 세계'가 어떻게 물리적으로 연동되고 교차하는지를 묻는다. 그에게 있어 전시장 안에서 발생하는 진짜 사건은 머릿속에서 쉽게 예견되는 관습적 이미지가 아니다. 그것은 텍스트의 감옥을 부수고 나온 사물들이 끊임없이 부딪히며 빚어내는 실재하는 물리적 장소이자 또 다른 사실의 세계이다. 달의 뒷면이 언제나 그곳에 존재함에도 스스로 빛을 발하지 않아 관성적인 시선으로는 결코 닿을 수 없듯, 임다현이 흩어놓은 사물들 역시 마찬가지다. 기꺼이 의심의 눈을 뜨고 작가가 설정한 조건 속으로 걸어 들어가지 않는 한, 그 이면의 사건은 영원히 가려져 있을 것이다. 결국 임다현의 작업은 시작과 끝이 명확히 닫힌 완결된 서사가 아니다. 마침표를 배제한 채 사물과 공간이 온몸으로 써 내려가는 전혀 다른 방식의 무대로 기능하고 있다. 지금 이 순간에도 그의 문장들은 조금은 다른 방식으로 호흡하며, 우리 경험 이면에 깃든 또 다른 사건의 장소들을 밝혀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