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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RITICISM & PREFACES

만질 수 있는 신기루와 만질 수 없는 진주

《만질 수 있는 신기루와 만질 수 없는 진주》 · 예술 공간 [:틈]

1 허공의 세계관

시간은 허공과 같아서, 손에 잡히지 않고 다룰 수 없다. 하지만, 내일을 향에 흘러가는 이 시간을 나누는 단위들이 있다. 연도와 날짜, 오늘과 내일, 그리고 하루 24시간 등 필요에 따라 다르게 분절된다. 우리는 다양한 도구를 통해 이 분절된 개념을 활용한다. 달력, 일정표, 시계 등은 인간이 누릴 수 있는 안정된 생존을 위해 끊임없이 발전되어 왔다. 하지만, 가상의 공간과 정보들이 난무하는 지금의 이곳에서 이 수치들은 편집되고 호도되고 있다. 많은 시선을 머물게 하기 위해 사물과 풍경을 매만지지 않은 채 바람과 공기가 흐르는 피부 위의 감각을 과감하게 잘라 낸다. 이로써 이득과 이윤을 취할 수 있고, 효율적으로 소비될 수 있는 이미지만이 우리 눈앞에 달라붙는다. 이렇게 전달된 형과 색은 본래 그 대상이 지니고 있는 축적된 시간과 오감으로 경험하고 체험할 수 있는 감각이 유실되고 있다.

2 신기루

이 모든 현상은 일종의 신기루일지도 모른다. 효율적이고 효과적이라고 생각했던 이미지의 생산으로부터 시작되어, 이제 우리는 그 어떤 것도 진실이 될 수 없는, 원본과 실체조차 자기 모습을 상실하는 곳에 두 눈을 의탁하게 되었는지 모른다. 이번 전시, ‘픽셀 유토피아’는 회화 작업에 대한 태도를 전복과 분석의 방법으로 접근하는 두 작가의 장면을 병치한다. 그들은 각각 세로와 가로의 화면 전개, 풍경의 보편적 좌표와 사물화된 풍경에 관한 질문을 두고 상실된 공허에 있는 우리의 눈을 의심하게 한다.

먼저, 작가 박선진은 지극히 보편적인 풍경을, 이미지를 구현하는 도구, 혹은, 그것 조력하는 시스템을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만들어낸다. 풍경이라는 단어에 새겨진 통상적인 툴(도구)을 제시하고 그것이 만들어지기 위해, 필요한 그래픽의 요소들을 적극적으로 드러낸다. 컴퓨터 화면에서 발광하는 화면처럼, 얇고 둔탁한 색과 면, 그리고 아날로그의 방식으로 그려져 왔던 회화의 붓질이 그의 화면 안에서 병치되고 있다. 작품 제목 또한 일련번호와 같이 날짜와 시간을 의미하는 숫자로 이루어져 있다. 이는 오늘의 풍경이 가지는 두 가지 측면을 교차 편집하는 일이다. 디지털이미지가 만들어지는 도구와 기호적 관점에서 생성되는 수치(디지털 숫자로 만들어진)의 이미지, 그리고 손과 붓, 그리고 종이가 만들어내는 우발적이고 유연한 번짐으로 구현되는 질감이 서로 섞이는 동시에 분리되는 것이다. 그는 잡을 수 없는 결과물, 결코 결승점으로 닿을 수 없는 데모 이미지들이 나열하고 있다. 손에 잡히지 않는 사물과 풍경을 매만지면서 동정과 동경이 자리하는 텅 비어버린 공간으로 입장하게 한다. 박선진이 열어낸 곳은 이제 더 이상 비현실이 아니다. 바로 이곳, 박선진의 장소에는 만질 수 있는 신기루가 구현되고 있다. 반면, 전혜수 작가는 우리가 흔히 경험하고 있는 모바일과 웹 화면의 세로형 시점 이동에 주목한다. 풍경이 성립될 수 있는 수평선, 지평선, 소실점이 활용되고 있지만, 위와 아래로 흐르는 종단의 이야기가 더욱 강조되는 평면이다. 족자와도 유사한 이 화면은 벽이라는 한 가지 지지대를 사용하지 않는다. 천장에 걸려 벽을 스치고 바닥을 지나가거나 몇 개의 축을 활용하여 물결과 파도와 같은 형태로 이미지들이 전개되기도 한다. 그의 이러한 화면은 가로형으로 전개되는 풍경이라는 미디어의 이야기 구조를 조금씩 전복하려는 의도로 비추어진다. 배경과 아이콘이 결합된 화면이며, 흐름과 움직임만 남아 있는 디지털 진열장과 유사하다. 전시장 다른 한편에 비치된 또 다른 작업은 사물과 상품을 조망한다. OS 화면에 배치된 아이콘, 혹은 인터넷 쇼핑 플랫폼에서 볼 수 있는 상품의 배치와 유사한 배열을 취하고 있다. 그러나 그들의 상품성과 이미지는 안개처럼 불투명하다. 빛과 조명을 허용하지 않는 이 불투명한 상자는 표준화되고 보편화된 상품의 껍질을 봉인하고 있다. 덕분에 작가반복되는 소비와 소진을 유도하지 않는다. 오히려, 미래의 유물처럼, 혹은 내일의 유산처럼 아직 도래하지 않은 시간을 동경하고 그리워할 수 있는 여지를 만들어내는 만질 수 없는 오늘의 좌표를 드러내고 있다. 그가 드러내는 종단의 이야기와 풍경, 그리고 불투명한 상자에 봉인된 사물은 만질 수 없지만, 어떠한 방향으로도 진입하고 탈출할 수 있는 통로가 열려있다.

3 만질 수 있는 상실과 허공

오늘의 디지털 매대에서는 물건을 만질 수 없다. 이곳에 놓인 사물은 일종의 허공이다. 브랜드와 제품으로 대변되는 가상의 풍경과 이미지들은 촉감과 냄새가 사라진 지 오래되었다. 우리의 눈으로 유입될 뿐, 생산할 수 있는 감각은 사라지고 있다. 작가 박선진과 전혜수는 이러한 허공의 장소와 시간에서 각자가 지향하는 노스텔지어를 소환한다. 외부에서 만들어지고 유입된 이미지의 울타리를 거부하여 허공에서 빠져나오거나(전혜수), 반대로 그것을 수용하면서(박선진) 허공이 지닌 상실의 풍경을 좌대 위에 올려놓는다. 우리의 눈 속에 움켜쥐고 있지만, 이내 손에서 휘발되는 상실의 사물과 풍경을 잡아내기 위해 오늘도 두 작가는 하나의 질문, 하나의 좌표에서 서로 다른 각도로 시선을 뻗어내고 있다. 우리 앞에 놓인 허공으로써의 가상과 그 안에 깃든 이미지, 그리고 사물은 현실에서의 밀도와 무게가 없다. 하지만, 다른 관점에서 우리 각자를 강력하게 연결할 수 있는 평등한 체험과 경험의 장소를 지니고있다. 손에 잡히지 않는 이 사물과 이미지는 주어진 얇은 피막과 얕은 부피를 통해 우리가 지닌 시선을 동일하게 동기화할 수 있는 도구이다. 사방으로 출입할 수 있는 통로와 이곳과 저곳 사이의 틈을 또 다른 가능성의 장소로 재생산할 수 있는 가능성을 지닌다. 그렇기에 두 작가의 질문을 통해 드러나는 두 가지 양태의 풍경은 마침표가 찍히는 결말의 이야기가 아니다. 이곳은 끝과 시작이 구분되지 않는, 순환되고 복원되는 상실과 허공의 육신이 생산되는 곳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