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도착하지 않은 그림
《아직 도착하지 않은 그림》 · 미오갤러리
1 도착하지 않은 문장
자본으로 만들어진 거대한 세계는 놀랍도록 매끄럽다. 많은 것은 대체 가능하고, 환산할 수 있으며, 균질한 표면 위를 미끄러지듯 이동한다. 더불어 복제된 상품과 이미지, 그리고 소리가 많은 이들의 감각에 맴돌고 있다. 이 동일성의 세계에서 우리에게 주어진 유일하고도 명확한 목적지는 ‘죽음’뿐이다. 이것은 거역할 수 없는 물리 법칙이다. 만유인력이 사과를 땅으로 끌어당기듯, 시간이라는 절대적인 중력은 우리를 죽음이 기다리고 있는 내일로 떠민다. 우주의 관점에서 본다면, 항성과 행성, 그리고 그 주위를 맴도는 위성의 궤도처럼 우리의 삶 또한 생성과 소멸을 반복하는 건조한 패턴에 불과할지 모른다. 대량 생산된 상품처럼 매끈하게 다듬어진 시간 속에서, 울퉁불퉁한 ‘나’의 기억은 어디에 기생할 수 있을까. 전시 <아직 도착하지 않은 그림>은 바로 그곳, 묵살된 시간의 틈새에서 출발한다. 전시에 참여한 세 명의 작가들은 빠르게 흘러가는 시간을 잡아채거나, 이미 지나가 버린 과거의 살갗을 문지르고, 완결되지 않은 문장을 새긴다. 매끈한 미끄럼틀 위에 뿌려진 모래알처럼, 무심한 속도에 저항하는, 거칠고 투박한 글귀를 남긴다.
2 세 가지 편지
김성수의 시선은 우리가 흔히 흐른다고 믿는 시간의 통념을 거스른다. 우리는 시간을 강물처럼 연속적인 것으로 인식하지만, 김성수에게 시간은 공간적으로 점유되어야 할 일종의 영역이다. 그의 화면 위에서 시간은 흐르는 것을 멈추고 드넓게 펼쳐진다. 그는 동일한 장소, 동일한 시간대에 수집된 사진, 이미지의 조각들을 도구로 삼는다. 우리의 눈은 하나의 초점만을 허락하지만, 김성수는 카메라 렌즈를 통해 파편화된 여러 개의 시선을 한 곳에 채집한다. 그리고 평면 위에 그 조각들을 정교하게 엮어낸다. 이것은 하나의 시점으로는 결코 닿을 수 없는, 대상의 저 뒤편과 양옆, 보이지 않는 사각지대까지 아우르는 파노라마의 구축이다. 흥미로운 것은 이 구축의 과정에서 물리적인 시간의 흐름은 삭제된다는 점이다. 사진이 찍힌 순간과 순간 사이의 간극, 셔터와 셔터 사이의 찰나는 그림 속에서 증발한다. 대신 그 자리에는 명징한 ‘좌표’가 들어선다. 흐르지 않고 켜켜이 쌓인 시간, 혹은 사라짐으로써 비로소 획득된 입체적인 공간. 김성수의 그림은 우리가 무심코 스쳐 지나간 장면에 얼마나 깊은 심도가 있었는지를 드러낸다. 그것은 사라진 시간 위에 세워진, 결코 무너지지 않는 일인칭의 증명이다.
김성수가 시간을 공간으로 변주했다면, 배지인은 시간의 층위를 ‘피부’의 감각으로 치환한다. 그에게 기억은 머릿속에서 일어나는 추상적인 작용이 아니라, 살갗에 닿는 촉각적인 사건이다. 작가의 화면 속에서 낡은 사진들은 서로 겹치고, 스며들고, 때로는 서로를 밀어낸다. 그는 흐릿하게 풍화되어 가는 기억의 단편들과 여전히 날 선 가시처럼 뚜렷하게 남아 찌르는 과거의 흔적들을 한 화면에 포갠다. 이 중첩의 과정은 생경함으로 환기된다. 이는 타자와의 환경에 의해 만들어졌을지 모르는 장면이 현재의 내 피부 위로 옮겨붙는 전이(Transfer)의 과정이다. 그의 화면에서 낡은 사진 속 인물들은 더 이상 과거에 박제된 유령이 아니다. 그들은 겹겹이 쌓인 물감의 두께를 뚫고 나와, 지금 여기 살아있는 작가의(그리고 관객의) 피부와 접촉한다. 화면 위에서 부유하는 이미지들은 사라짐의 경계에 서 있다. 어떤 형상은 안개처럼 희미하며, 또 어떤 형상은 문신처럼 선명하다. 배지인의 작업은 시각적인 관람을 넘어, 기억의 질감을 손끝으로 더듬는 듯한 공감각적 경험을 선사한다. 이를 통해 우리가 도저히 통과할 수 없었던 연민의 모양을 드러나게 한다.
자본주의 사회는 언제나 명확한 ‘결과’를 요구한다. 과정은 결과(상품)를 위해 봉사해야 하며, 모든 언어는 논리적으로 소통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신규섭은 이곳의 요구를 온몸으로 거부한다. 그의 회화는 화려하게 피어난 ‘꽃’이 되기를 거부하고, 질기고 거친 ‘가죽’으로 남기를 자처한다. 신규섭의 작업 방식은 ‘결승점이 없는 달리기’와 같다. 목적지를 정해두고 최단 거리를 주파하는 것이 아니라, 달리는 행위 그 자체의 호흡과 근육의 움직임에 집중한다. 오토마티즘(Automatism)에 기댄 그의 붓질은 논리적인 언어로 정제되기 이전의 상태, 즉 입안에서 맴도는 웅얼거림이나 가슴 깊은 곳에 맺힌 알 수 없는 응어리를 그대로 배설한다. 그의 캔버스에 남겨진 형상들은 미완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것은 부족하여 맺지 못한 결실이 아니라, 의도적으로 유보된 가능성의 결말이다. 명확한 형상이나 메시지로 굳어지는 순간 휘발되어 버릴, 그 미묘하고 끈적한 내면의 진실을 포착하기 위해 작가는 끊임없이 머뭇거린다. ‘꽃이 되지 못한 가죽’은 실패의 은유가 아니다. 그것은 가공되지 않은 날것의 생명력, 그 비릿하고도 질긴 실존의 증거다. 신규섭의 그림 앞에서 우리는 세련된 언어로 설명할 수 없는, 묵직한 침묵의 덩어리를 마주하게 된다.
3 양피지에 새긴
이번 전시 <아직 도착하지 않은 그림>은 디지털 액정 화면처럼 매끄럽게 빛나는 지금의 시간 속에서, 세 작가가 각자의 방식으로 무두질해 낸 기록을 담아낸다. 김성수는 수많은 사진 조각을 보이지 않는 실로 꿰매어 자신만의 좌표를 세웠고, 배지인은 타인의 얼굴과 나의 정서적 피부를 겹쳐 잊혀가는 기억을 붙들었으며, 신규섭은 날것의 가죽 질감 위에 언어가 되지 못한 침묵을 새겼다. 이 세 가지 층위는 결국 ‘신체’라는 하나의 뿌리로 연결된다. 자본과 속도가 삭제해 버린 몸의 감각, 그 투박하고도 진실한 신체가 여기 있다. 우리는 모든 장소에 있지 못하며 모든 이들과 만나지 못한다. 그리하여 만나는 이들과 방문한 장소보다 서로 스쳐 지나는 이들과 장면들이 더 많을 것이다. 내가 누군가의 곁을 지나갔을 때, 혹은 누군가가 나의 곁을 스쳐 지나갔을 때, 우리는 서로에게 어떤 장면이었을까. 세 명의 작가는 당신에게 이 투박한 글을 건넨다. 이것은 매끄러운 모니터 위에서는 결코 읽을 수 없는 문장이다. 당신의 눈이 아닌, 당신의 피부와 호흡으로 이 편지를 읽어주기를 바란다. 낡은 양피지 위에 꾹꾹 눌러쓴 이 흔적들이, 당신의 곁을 지나간 시간의 뒷모습을 다시금 돌아보게 하기를 기대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