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oho Park박소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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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RITICISM & PREFACES

시간의 물결

《김둥지 제5회 개인전》 · 별관

1. 먼지와 안개

안개와 먼지가 채 구분되지 않는 이 도시에는 그을리고 태워진 작은 알갱이들이 뭉쳐서 만들어낸 거대한 건축물들이 즐비하다. 아침과 저녁이 교차하는 빛 속에서, 이 회색의 숲은 무감각한 덩어리들의 집합으로 진화하고 있다. 많은 것들이 일정한 패턴으로, 일정한 거리를 두고 치밀하게 만들어지고 있다. 거리를 걷는 이들의 유사한 복장과 규격화된 동선은 멀리서 조망할 때 매우 조직적이고 체계적인 풍경을 연출한다. 하지만 이 거대한 구조물을 조금만 가까이서, 천천히 들여다보면 조금은 다른 방향의 풍경들이 다가오곤 한다. 새들은 나무 위가 아닌 아파트 외벽 에어컨 실외기에 위태로운 둥지를 틀고, 땅을 잃어버린 나무들은 아스팔트가 허락한 좁은 영토 안에서 간신히 생을 유지하고 있다. 자연이 머물렀던 자리는 콘크리트의 자리가 되었고, 내부와 외부는 불투명한 반사체로 이루어진 유리창에 의해 완벽히 차단되었다. 일정한 자격을 갖추지 못하면 진입조차 허락되지 않는 공간들이 깊고 단단하게 뿌리를 내리고 있다. 각자의 영역을 방어하는 이 거대한 방공호들의 연속은 사적인 영토를 철저히 보존하고 있지만, 타인과의 심리적 거리와 계급의 격차를 줄이지는 못했다. 주택에서 빌라로, 빌라에서 아파트로, 그리고 마침내 닿을 수 없는 높이의 마천루에 이르기까지 벽은 한 층 두 층 높아지고 있다.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는 시선을 독점할 수 있는 그곳은 누구나 오를 수 없다. 자연의 산은 시간과 노력을 투자하면 정상을 허락한다. 더불어 험난한 길을 오르는 과정에서 타인과의 협력과 연대로 닿을 수 있는 공평한 장소다. 하지만 이 콘크리트의 도시는 그러한 무형의 가치나 신체의 정직함을 수용하지 않는다. 자유로운 새들조차 함부로 드나들 수 없는 이곳은 이제 구분과 배제의 낙원이 되었다.

2. 얼굴들

도시의 차갑고 단단한 질감을 지니고 있는 김둥지 작가의 화면은 역설적이게도 물결과 같이 지속적으로 일렁인다. 또렷하게 재단된 사각의 캔버스 위로, 둔탁하고 거친 질감이 보는 이의 시선을 잡아둔다. 그리고 이내 묵직하고도 부드러운 표면 사이로, 눈을 오래 머물게 하는 단순한 모양의 사물과 형상들이 서서히 드러나기 시작한다. 무심하게 끄적인 낙서 같기도 하고, 오래된 동굴 벽화에 남겨진 도상처럼 보이기도 하는 이 모양들은 두터운 바위 표면을 긁어낸 흔적처럼 표현되어 있다. 특히, 이번 전시에서 눈에 띄는 부분은 바로 사람의 형상들이다. 서울 곳곳에서 마주칠 수 있는 출퇴근하는 사람들, 골목의 청과물 시장 풍경, 술자리의 취객 등 복잡하고 우글대는 도시의 작은 조각들을 담아냈다. 간략한 기호로 만들어진 사람의 모양은 다양한 크기의 화면 속에서 이야기의 조각적 단편들로 자리하고 있다. 작가는 이 복잡한 곳에서 살아가는 이들을 멍하니 관찰하며 때로는 얕은 연민이나 냉소를 보내기도 하지만, 결국 타인의 처지에 섣불리 개입하지 않고 철저한 타자로서 거리를 둔다. 구체적인 표정과 복잡한 서사가 소거된 그 둥글고 뭉툭한 얼굴들은 서로 스치고 지나갈 뿐인 현대인의 좁힐 수 없는 정서적 거리감을 고스란히 드러내며 겹겹이 쌓인 물감의 지층으로 흡수된다. 감정의 동요 없이 한 걸음 물러서서 바라본 사람들의 몸짓은, 마치 길거리의 나무나 건물처럼 삶의 터전을 구성하는 하나의 담담한 풍경으로 환원된다. 위태로운 콘크리트 틈새에 자리 잡은 이 작고 단순한 사람의 모양들은 인간이라는 견고한 틀에서 벗어나, 화면 속 다른 사물이나 연약한 생명들과 동등한 곳에 놓였다. 작가는 적당한 거리를 둔 채로, 인간이 만들어낸 복잡한 기호와 문자의 세계관에서 한 발짝 물러나 있는 화면을 만들어 냈다. 그리고는 많은 이들의 깊은 곳에 공통으로 묻어나 있는, 언어로 희석되지 않은 가장 보편적인 교집합의 모양들을 길어 올리고 있다.

이렇듯 그의 캔버스에는 눈에 비친 사물과 생명들이 수식어를 벗어던진 형태로 맺혀 있다. 아득히 먼 거리에서 보이저호가 보낸 지구의 이미지를 바라보면서 '창백하고 푸른 점’이라고 말한 칼 세이건의 시선처럼, 작가 역시 빠른 속도로 솟구치는 기념비들의 땅에서 끊임없이 움직이는 작고 연약한 것들을 지긋이 그려내고 있다. 그 모양들은 희미한 물결에 비치는 아련한 잔상 같다가도, 아주 부드러운 원단 위에 서서히 스며든 물감처럼 보이기도 하며, 때로는 스케치북에 크레파스를 꾹꾹 눌러 그린 아이의 천진난만한 그림처럼 다가오기도 한다. 이는 단순히 표면을 만들어내고 그 위를 도구로 긁어낸 정지된 결과물이 아니라, 질감과 선, 그리고 형태가 그림을 그리는 작가의 체온이 담긴 손에 의해 끊임없이 뒤섞이면서 갱신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작업을 만들어내는 과정에서 그는 섣불리 뚜렷한 완성의 상태를 좇지 않는다. 오히려 과정에 머무르며 캔버스와 지속적으로 질문하고 답한다. 전시장을 채운 이 작고 무른 형상들은 거대한 도시의 속도와 견고함에 맞서지 않는다. 대신 그 틈새에서 조용히 읊조리면서, 우리가 오랫동안 잊고 지낸 어떤 감각—말이 되기 이전의, 가장 단순하고 원초적인 공감의 감각—을 되짚게 한다. 차갑고 단단한 도시의 표면 위로 끊임없이 일렁이던 첫 문장의 역설은 이렇게 다시 완성된다. 견고해 보이는 것들 속에서도 무언가는 여전히 움직이고, 흔들리며, 살아 있다는 것. 김둥지의 화면은 그렇게 말하고 있다.

3. 시간의 물결

작가의 개별 작품들을 과거부터 현재까지의 시간선 위에 차례로 올려놓고 찬찬히 살펴보면, 텍스처의 미세한 변화와 형태의 변주가 지속적으로 변주되어 왔음을 인지할 수 있다. 메마르고 건조한 회색 도시의 모습과 달리, 그의 화면은 촉촉한 비를 머금은 콘크리트와 같다. 비에 젖은 콘크리트가 특유의 짙은 색을 띠며 흙내음을 닮은 냄새를 풍기듯, 작가에게 캔버스는 단순히 그림을 그리는 바탕재가 아니다. 그것은 허공으로 날아가 버리려는 것들을 붙잡아두는 단단한 땅이자, 손에 잡히지 않는 무형의 감정과 기억들을 포획하려는 다정한 상자이며, 도심 속에서 위태롭게 흔들리는 것들의 발을 머물게 하는 안식처다.

철학자 한병철이 자신의 저서 『사물의 소멸』에서 말했듯, 우리는 모든 것이 데이터베이스화되고 정보화되어 더 이상 손으로 만져지지 않는 비사물의 방향으로 나아가는 가속의 시대를 살고 있다. 스마트폰 화면과 매끈한 가상 현실 속에서 우리의 감각은 점차 납작해진다. 김둥지의 작업은 시대의 속도에 역행하듯 지극히 사물적이고 물리적인 태도를 굳건히 견지한다. 촉각을 곤두세우게 만드는 그의 작업은 촉각의 회복을 향한 의지로 다가오기도 한다. 이러한 태도는 그동안의 전시에서 사용된 포스터의 제작 방식에서 더욱 드러나고 있다. 일반적으로 포스터는 전시가 열리기 전, 디자이너와의 협업을 통해 매끈하게 만들어진다. 대부분 컴퓨터의 디지털 툴을 활용하여 전시의 컨셉과 방향성을 시각적으로 드러내고, 장소와 기간, 전시의 제목과 같은 정보를 전달하는 일회성 매체로 기능한다. 하지만 작가는 이전 전시들에서와 마찬가지로 이번 전시에서도 이러한 기성 방식을 비틀어 자신만의 태도를 포스터에 담았다. 포스터의 제목은 ‘김둥지 제4회 개인전’으로 명시되어 있으며, 손수 그려낸 독립된 그림으로 자리한다. 집 앞에 걸린 현판처럼, 혹은 한 자 한 자 눌러 쓴 초대장처럼, 이 포스터는 관객을 맞이하는 전시장 진입로에 배치된다. 직접 붓을 들고 제작한 포스터 그림을 통해 작가는 창작의 영역을 캔버스 너머로 확장하는 동시에, 보편적으로 정보 전달에 그치는 포스터의 역할을 새롭게 갱신하고 있다. 그는 구태여 목소리를 높이지 않는다. 거대한 콘크리트 유토피아 속에서 각자의 방식대로 거주하고 있는 동그랗고 네모난 우리를,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 시선으로 그저 지긋이 바라볼 뿐이다. 고정되거나 경직되지 않기 위해, 또는 명확한 좌표에 머무르지 않기 위해, 그는 여전히 상상의 발을 허용하는 시간의 물결을 만들어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