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oho Park박소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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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RITICISM & PREFACES

이야기를 주무르는 손

《산책하는 그림자》 · 예술공간 집 · 2026.07.23–08.12

1. 만질 수 없는 이야기

이야기는 인류가 만들어낸 가장 오래된 유산 중 하나다. 자연과의 관계, 인물의 생애, 역사적 사건 등 사실을 바탕으로 각색된 이야기가 있는가 하면, 전혀 새로운 국면을 창조하며 내일(미래)을 향해 나아가는 이야기도 있다. 특히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는 구전은 지역과 세대를 거치며 각자의 상상력이 더해져 점차 진화한다. 여기서 상상력은 매우 중요한 힘을 발휘한다. 닫혀있거나 열린 결말을 선택할 수도 있고, 현실과는 다른 염원을 담아 마침표를 찍을 수도 있다. 이는 오로지 화자에 의해 결정된다. 그러나 디지털 미디어 시대에 접어들며 우리는 고유의 이야기를 잃어버렸다. 디지털 화면 속의 이야기는 더 이상 상상력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자유로운 상상의 세계는 닫혀 버렸고, 많은 것들이 이미 완벽한 형태로 구현되어 눈앞에 펼쳐진다. 이제 이야기는 변화하지 못한다. 화자의 숨결과 청자의 상상력이 서로 마찰하며 빚어내던 이야기 고유의 오돌토돌한 '촉감'이 휘발되어 버린 것이다. 상상력이 개입할 여백을 앗아간 디지털의 시각적 이미지들은 이야기의 표면을 한없이 납작하게 깎아내고 있다.

이야기가 그 거칠고 다채로운 질감을 잃어가면서, 우리는 동시에 무언가를 만지는 '촉각'마저 잃어가고 있다. 거대한 플랫폼으로 재편된 사회, 결코 끊어지지 않는 모바일의 거미줄 속에서 우리는 점차 서로의 피부를 맞댈 수 없게 되었다. 매일같이 마주하는 스마트폰의 액정 화면은 유려하고 매끄럽다. 철학자 육 후이(Yuk Hui)가 지적하듯, 디지털 기술이 구축한 환경은 세계의 복잡하고 거친 물질성을 매끈한 인터페이스 뒤로 은폐해 버린다.1 이 유려한 스크린은 우리에게 이질감이나 타격을 주지 않으며, 가벼운 미끄러짐(swipe)만으로 세상을 통제할 수 있다는 환상을 제공한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대상을 데이터로 환원해 버린 이 흠결 없는 환경은 우리의 감각을 서서히 마비시킨다. 무언가를 진정으로 '만진다'는 것은 대상의 거친 표면과 나의 피부가 부딪히며 발생하는 마찰이자, 나와는 다른 존재(타자)를 향해 손을 뻗을 때 겪게 되는 필연적인 저항의 경험이다. 모든 것이 디지털 가상 공간으로 옮겨가고 손가락 끝의 가벼운 몸짓만으로 세상을 통제하게 되면서, 우리는 스스로를 보호할 장벽을 세운 대신 촉각을 잃어버렸다. 거친 흙의 질감, 녹슨 철의 온도, 서로의 체온과 같은 현실의 촉각적 경험이 탈각된 이 세계는 안락하고 화려해 보일지 모른다. 하지만 실상은 타자와의 접속이 끊어진 채 각자의 고립된 방에 갇혀버린 무감각한 '폐허'와 다름없다. 우리는 단 한 번도 피부를 부딪치지 않고도 세계와 연결되어 있다고 착각하며, 점점 더 아무것도 만질 수 없는 곳으로 스스로를 유폐하고 있다.

2. 연출하는 사람, 윤상하

디스토피아적 세계관 속에서 시간이 지나 사라진 것들, 모든 것이 무너져 내린 자리가 있다. 어린 시절 살던 동네는 재개발과 자본의 논리에 밀려나 폐허가 되었고, 함께하던 친구들은 사라지고 없다. 윤상하 작가는 그 텅 빈 공백 위에서 마치 무대 연출가처럼 새로운 세계를 축조해 낸다. 2영화 <헤드윅>의 애니메이션 시퀀스가 상실과 결핍의 신화를 그려내듯, 윤상하의 작업 역시 시간의 흐름을 따르는 연속적인 서사 속에서 어둡지만 유쾌한 이야기를 건넨다. 그는 무너진 지형 위에 처음부터 끝까지 새로운 인물과 땅, 건물과 이야기를 지어내며 자신만의 세계를 재건한다. 나아가 상실되어 가는 것들을 추적하며 위태로운 존재들을 주목한다. 끊임없이 붕괴하고 재편되는 도시의 삭막한 풍경과 그 이면에 버려진 감각들은 작가의 거친 붓질과 손짓을 통해 화면 위로 묵묵히 구현된다. 그의 작업은 매끈하게 포장된 현대 사회의 표면을 긁어내어 그 안쪽에 숨겨진 날 것의 상흔을 직시하는 일종의 저항적 기록이자 애도로 읽힌다. 작가는 문명과 폐허, 생명과 사물이라는 굳건한 이분법적 구도를 허물고, 서서히 붕괴하는 시간 속에서 연약한 상상에 깃든 거친 질감을 기어코 드러낸다.

개인전 《산책하는 그림자》는 이러한 거시적인 작업의 궤적을 깊숙한 곳에서 길어 올린 결과물이다. "우리는 모두 저마다의 무너진 풍경 속을 걷는 그림자다"라는 작가의 고백으로 시작되는 이 전시는, 낡은 동화처럼 남아 있던 작가 자신의 꿈과 현실 세계를 과감하게 허무는 행위로부터 출발한다. 이는 단순한 공포나 기상천외한 환상이 아니다. 까맣게 잊고 있던 이미지들이 어느 날 낯선 얼굴을 하고 되돌아오는 기묘한 순간을 포착한 것에 가깝다. <파라다이스 호텔>, <해골병사의 성>과 같은 평면 작업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나듯, 꿈과 현실의 경계는 매우 연약하다. 밤마다 의식의 틈을 비집고 흘러내리는 내면의 불안은 캔버스라는 물리적 공간을 잠식하며, 엉켜있는 철골 구조물이나 앙상한 나뭇가지 같은 선들의 중첩을 통해 기묘한 환상의 무대를 세운다.

윤상하가 그려낸 인물이 걷는 세계는 하나의 거대한 폐허다. 하지만 이 폐허는 특정한 물리적 장소나 시간성에 국한되지 않는다. 폐장된 놀이공원과 무너진 성채, 버려진 병원과 불 꺼진 모텔, 붕괴한 도시와 이름을 잃은 광장이 파편적으로 결합하여 하나의 거대한 심리적 지형을 이룬다. 위태로운 경계선 위로 밀려든 이 잔혹한 풍경화는, 스스로를 구원하기 위해 떠나는 기나긴 여정의 새로운 출발점임을 선언하고 있다. 뼈대만 남은 이 거대한 폐허 속에는 조금 이상한 존재들이 살고 있다. 길을 나선 지친 양은 처절하게 약국을 찾아 헤매고, 고장 나 추락한 비행기들은 영영 하늘을 벗어나지 못한 채 같은 궤도만을 반복해서 선회한다. 녹슨 갑옷을 덧입은 해골 병사는 말 위에서 깊은 침묵을 지키며 폐허를 순찰하고, 부서진 인형은 오지 않을 주인을 묵묵히 기다리며, 이름을 잃어버린 용사는 무너진 성벽 앞을 차마 떠나지 못하고 맴돈다.

영상 작업 <퍼펙트 슬립(Perfect Sleep)>에 등장하는 벌거벗은 인물들은 텅 빈 눈동자로 서로의 머리를 열어 의식을 연결하거나, 수많은 눈알과 기형적인 촉수를 지닌 생명체들이 우글거리는 장소로 하강한다. '완벽한 수면'이라는 역설적인 제목과 달리, 이들은 가장 깊고 어두운 꿈의 미로를 유영하며 불안의 궤도를 끊임없이 배회한다. 이들은 길을 잃고 방황하는 것이 아니다. 아직 도착할 장소를 찾지 못한 위태로운 존재들일 뿐이다. 이 폐허에 당도한 존재들은 모두 지쳐있으며, 더 이상 어린 시절의 해맑은 표정을 짓고 있지 않다. 한때 친숙했던 얼굴들은 꿈속의 왜곡을 거쳐 조금씩 변형되었고, 이제는 도리어 이질적인 시선으로 우리를 응시한다. 현실은 점차 환상을 닮아가고, 역으로 환상은 현실보다 더 현실적인 얼굴을 띠게 된다. 화면 속 모든 것은 분명히 살아 숨 쉬는 듯하지만, 어딘가 미세하게 어긋나 있다. 그 오차가 관람객으로 하여금 도무지 설명할 수 없는 근원적인 불안을 자아내고, 동시에 결코 쉽게 눈을 뗄 수 없게 만드는 기묘한 촉감을 형성하고 있다.

3. 꿈의 질감

작가가 그려낸 세계 안에서 꿈은 결코 현실의 반대편에 위치한 안락한 도피처가 아니다. 꿈은 현실이 끝내 소화하지 못하고 밀어낸 감정들이 흘러들어와 구축된 또 하나의 거대한 생태계다. 의식은 밤을 맞아 잠들지언정, 감정은 결코 잠들지 않기 때문이다. 현실에서 겪은 뼈아픈 상실은 이 세계에서 다양한 동물이 되고, 위태로운 희망은 요정이 되며, 억눌린 불안은 걷잡을 수 없는 검은 숲으로 자라난다. 그리하여 작가가 구축한 이 폐허는 모든 것이 파괴되어 끝나버린 닫힌 장소가 아니라, 여전히 끈질기고 뜨겁게 호흡하는 열린 장소가 된다.

이곳의 폐허와 숲, 그리고 그 안을 배회하는 생명체와 인물들은 특정한 서사 구조를 설명하기 위한 기능적 상징물에 불과한 것이 아니다. 파편화된 여러 차원의 기억들이 하나의 꿈속에서 우연히 조우하고, 그 안에서 호흡하며 새로운 인과관계를 맺어가는 것이다. 작가는 스스로를 이 풍경 밖에서 거리를 두고 바라보는 특권적인 관찰자가 아니라, "이미 그 안을 걷고 있는 또 하나의 그림자”라고 고백한다. 이 선언은 전시장을 찾은 관람객을 향한 내밀한 초대이기도 하다. 아무것도 만질 수 없는 매끄러운 현실에서 빠져나와, 작가가 캔버스 위에 물감의 두께와 거친 붓질로 쌓아 올린 이 물리적인 폐허를 눈과 마음으로 더듬어 보라는 간절한 제안이다. 작가는 관람자가 안전한 거리에서 단지 ‘보는 사람’으로 머무는 것을 경계한다. 대신 그들이 작가의 흔적과 함께 기꺼이 이 위태로운 폐허를 걷고 만지는 '산책자'가 되기를 바란다. 납작한 스크린 속에서 상실했던 이야기의 거친 촉감이, 겹겹이 쌓아 올려진 안료의 밀도를 통해 비로소 우리의 피부에 닿기 시작한다. 현실의 뒤편을 소리 없이 맴돌던 환상이 어느 순간 내 곁에 나란히 서서 걷게 되는 기적 같은 경험. 캔버스 너머로 아스라이 들려오는 붕괴와 생성의 소리에 귀 기울이며, 작가는 이 거대한 극장의 연출가가 되어 관객에게 손을 내민다. 상처받지 않기 위해 스스로를 가두었던 무감각의 방을 나서서, 서로 마찰하고 부딪히며 다시 살아 숨 쉬는 이야기를 만지는 이 모험의 동반자가 되어달라고 말하고 있다.

주석

  1. 홍콩 출신의 철학자이자 기술 이론가인 육 후이(Yuk Hui)는 『디지털 대상의 존재에 대하여(On the Existence of Digital Objects)』 등의 저서를 통해 현대의 디지털 환경과 기술, 그리고 물질성의 관계를 심도 있게 탐구해 왔다. 그는 데이터와 알고리즘으로 직조된 현대의 디지털 환경이 사물이 지닌 본래의 복잡성과 거친 물질성을 매끄러운 스크린(인터페이스) 뒤로 은폐시키며, 결과적으로 대상과 맺는 인간의 신체적·감각적 경험을 변화시킨다고 비판적으로 분석한다.

  2. 영화 <헤드윅(Hedwig and the Angry Inch, 2001)>에 등장하는 애니메이션 시퀀스는 플라톤의 『향연』에 기록된 '사랑의 기원(The Origin of Love)' 신화를 바탕으로 한다. 신의 분노를 사 반으로 쪼개진 인간이 잃어버린 자신의 반쪽을 평생 찾아 헤매게 되었다는 내용으로, 근원적인 상실감과 결핍, 그리고 다시 온전해지고자 하는 처절한 갈망을 시각적으로 구현해 명장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