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 장:면
《다음 장:면》 · 고양아람누리 갤러리누리
1. 땅 적시는 물
물리적인 차원에서 바라보면, 그림은 면적에 따라 끝의 지점이 구획된다. 그리고 우리는 이 화면의 안과 밖의 경계를 구분한다. 그렇게 그림은 사물화되어 완성으로 나아간다. 이상덕 작가는 그림이 지니고 있는 이 물리적인 경계와 면적을 보다 관념적인 개념 위에 올려놓는다. 그의 작업에서 소실점은 한자리에 머물러 있지 않고 불특정한 곳에서 연쇄적으로 드러난다. 단편적이거나 귀납적인 결론, 혹은 결말의 목적지로 향하는 그림이 아니라, 이쪽에서 저쪽을 자유롭게 넘나드는 공기와 바람, 공간과 장소에서 항상 흐르는 절대적인 시간의 관점이 새겨진 풍경을 그려낸다. 그래서 그의 작업에서는 이야기의 흐름이 느껴지지만, 서사의 명확한 시작과 끝이 없다. 오히려 그 끝과 시작의 주도권을 관객에게 이양한다. 그래서 이상덕의 전시와 그림에서는 관객 각자의 선택과 동선에 따라 각기 다른 이야기가 만들어진다. 흥미로운 점은 캔버스 안에 그려진 대상과 화면 밖 현실에서 우리가 감각하는 보편적 대상이 물리적 경계를 허물며, 그 사이의 특정한 감각이 더욱 강조된다는 것이다. 이는 기호와 상징, 문자와 언어로 구조화된 세계의 문법이 화면 위에서 희석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의 작업은 숲, 바다, 우주와 같은 독립된 이미지를 나열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오히려 어제와 내일이라는 시간이 이어지고 피부와 피부가 맞닿는 촉감이 발현되며, 대상 간의 경계가 지워진 '연결의 장(場)'으로 기능한다. 작가는 경계와 틈새를 적극적으로 활용함으로써, 역설적으로 모든 구분과 구별이 희미해지는 공간을 만들어내고 있다.
2. 유리조각들
유리는 빛을 굴절시키고 시선을 파편화하여 대상을 다르게 보게 만드는 성질을 지닌다. 작가는 유리가 지닌 이 필터의 성질을 적극적으로 활용한다. 커팅된 여러 종이 조각이 매우 견고하게 접착되어 있어, 마치 투명한 수조나 수면 속을 들여다보는 듯한 청량함이 느껴진다. 이러한 표면 질감은 관람자가 대상을 즉각적으로 인지하는 시간을 조금 더디게 유도한다. 조각 사이사이에 보이는 접합 자국들은 평면과 입체를 오가며 착오와 착시 속에 펼쳐지는 파노라마를 만들어내고 있다. 특히 최근 작업에서 주로 다루는 물의 질감은 풍경 속 대상으로서의 물이라기보다, '물'이라는 현상 자체가 지닌 성질을 더욱 부각하는 요소로 작동한다. 아래로 떨어지는 폭포, 한없이 차가운 풍경의 장막은 저마다 독립된 명사라기 보다는, 현상을 만들고 이어주는 전치사 혹은 접속사로 연결된 장면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끊임없이 변화하고 소멸하는 현상들을 박제하려는 시도가 아니라, 오히려 그것들이 지닌 찰나의 연약함을 온전히 응시하기 위한 애정 어린 유예의 장치로 볼 수 있다. 장대한 풍경처럼 보이다가도 이내 시선이 머무는 이유는, 작가의 그림이 단순한 형태소로 구축된 것을 넘어 종이와 화면의 분할 및 재조합이 자연스레 드러나는 '연결의 풍경'이기 때문이다. 즉, 장면 안에 깃든 언어적 구분이나 기호적 상징(숲, 바람, 하늘, 땅 등)으로서의 풍경은 대상과 대상, 나와 우리, 이곳과 저곳이 자연스럽게 이어진 상태와 현상을 강조하는 그림인 것이다. 어쩌면 이상덕의 작업에서 대상은 특정하게 설명되거나 구획되는 사물(오브제)인 동시에 물리적 경계를 넘어 끊임없이 움직이며 주변 시공간과 관계 맺는 '현상' 그 자체일 것이다.
3. 쏟아지는 물방울
이상덕 작가의 화면에서 이러한 현상 자체가 강조되고 커다란 감각으로 부각되는 데에는, 화면을 치밀하게 잘라내고 다시 붙이는 수행적이고 노동집약적인 과정이 큰 몫을 한다. 그리는 손, 경계를 만드는 손, 그리고 이를 다시 접합하는 손으로 이어지는 일련의 과정이 있기에, 오랜 시간과 밀도의 층이 작품 속 현상적 풍경에 가늠할 수 없는 깊이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작가의 신작 〈같은 사이〉(2026)는 잘려 나간 조각들이 다시 이어지는 접합선인 종이의 틈이 보다 섬세하게 맞닿아 있다. 작가에게 이 틈은 존재를 갈라놓는 단절이 아니라 서로 다른 두 존재가 만나는 자리다. 잘린 조각과 조각 사이에 남은 미세한 여백은 완전히 하나가 되지도, 완전히 갈라서지도 않은 채 '같은 사이'라는 관계로 머문다. 제목의 '사이'는 거리의 표식이자 연결의 장치이며, 결코 완전히 분리되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조형적 증거다. 한편 〈깊어지는 자리〉(2026)는 절단과 접합이 반복되며 화면 위에 쌓이는 밀도의 힘을 보여준다. 종이를 자르고 붙이는 행위가 거듭될수록 그 지점은 평평한 표면에 머물지 않고 미세한 요철과 중첩으로 두께를 얻는다. 시간이 쌓이듯 접합의 흔적이 축적되며, 그 자리는 점점 깊어진다. 제목의 '깊어지는'은 물리적 두께의 축적이자, 동시에 그 자리에 스며든 사유와 감각이 응축되어 가는 과정을 함께 가리킨다. 이 두 작업이 품은 '틈'과 '깊이'의 감각은 폭포라는 격렬한 자연 현상 앞에서 다시 한번 몸으로 확인된다. 끊임없이 움직이는 액체인 물이 중력을 만나 수직으로 쏟아져 내릴 때, 그것은 맹렬한 에너지를 지닌 폭포가 된다.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기꺼이 자신을 내던지는 이 하강의 운동 속에서 물방울들은 공중에서 산산이 부서지며 흩어진다.
한 번 그려진 그림이 잘게 쪼개져 가느다란 조각으로 흩어졌다가 다시 접합되는 과정을 거쳐 이상덕의 그림은 완성된다. 개체가 모여 군집을 이루고 장대한 풍경으로 귀결되는 것이 아니다. 일정한 패턴이나 경계를 드러내는 조건으로 나뉘었던 종이의 선분들이 다시 만나 폭포를 만들어내고, 수평선과 지평선을 맞닿게 한다. 어쩌면 만날 수 없는 두 개의 장소와 장면이 이상덕의 화면에서 교차하고 있는 것이다. 이 연약한 조각들은 이내 바닥에 맹렬히 부딪히며 단단한 바위를 뚫어내는 거대한 파열음을 빚어낸다. 고정된 사물이나 이미지라기보다 '일종의 현상’에 가까운 이 ‘장:면’은 부서짐을 두려워하지 않기에 추락의 끝에서 무력하게 흩어지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파편화되었던 물방울들은 추락이라는 극한의 경험을 통과한 뒤 다시 하나의 거대한 웅덩이로 모여 흐르며, 기어코 누구도 쉽게 끊어낼 수 없는 단단하고 유연한 연결의 흐름을 이루어낸다. 이상덕은 캔버스라는 투명한 유리 조각, 혹은 그 묵묵한 수조 안에 이 장엄하고도 위태로운 폭포의 현상을 가두어 둔다. 우리는 그가 빚어낸 멈춰진 물방울의 집합 앞에서, 그리고 시간이 교차하는 지점에서 고립된 개체의 낙하와 충돌을 마주한다. 부서지면서도 끝내 연결되고, 기어이 하나로 흐르는 것. 그것이 그가 포착해 낸 현상의 문장들이며, 폭포처럼 쏟아져 내리는 장대한 이어짐의 장소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