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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RITICISM & PREFACES

이집의 주인은 누구요

《이집의 주인은 누구요》 · 레인보우큐브

오래된 과거의 일을 구전으로 전달한다는 것은 객관적인 사실을 담보하지 않는다. 화자의 내면에 깃든 사건은 무자비한 시간의 흐름 속에서 수많은 바램과 욕망이 투사되고, 슬픔과 분노, 연민과 같은 여러 감정들이 중첩되며 재구성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듣는 이의 입장에서도 이 구전을 통해 전달되는 이야기는 어느 정도의 각색과 주관적 왜곡이 개입되어 있음을 암묵적으로 인지한다. 우리는 그것이 실재하는 사실이냐 아니냐, 명확한 진실이냐 거짓이냐 하는 실증적인 잣대에 초점을 맞추지 않는다. 오히려 누군가의 입술을 거쳐 조심스레 전달되는 이야기는, 그 사람에게 깃든 '사물로서의 사건'과 '관념으로서의 사건'이 동시에 교차하여 이야기의 가변성을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덕분에 입으로 전달되는 일종의 시공간적 장면들은 듣는 이의 내면에서 화자의 체험으로 동기화되며, 우리는 이를 통해 또 다른 세계를 간접적으로 경험할 수 있는 전이(transference)의 기회를 얻는다. '나'라는 1인칭 시점의 사건을 넘어 윗세대의 1인칭 시점의 이야기를 탐색하는 것은, 그 자체로 경험의 전이이자 하나의 연극적 무대를 만든 것과 같다.

김윤하 작가의 전시, 《이집의 주인은 누구요》의 서막을 여는 것은 공간에 들어서면 나타나는 '환대의 중정'이다. 이곳은 다양한 소리들이 혼재되어 부유하는 공간이자, 관객을 전시의 내러티브 속으로 깊숙이 진입시키는 관계적 장소다. 중정에서 울려 퍼지는 종소리, 이른바 '환대의 종'은 일본 가미코치—할머니와 나눈 대화 속 이미지에서 출발해 작가가 직접 찾아낸, 상상과 실재가 겹쳐진 숲—에서 곰의 접근을 막기 위해 생존의 목적으로 사용되는 방울 소리를 대입한 것이다. 화산 활동으로 죽었으나 여전히 호수에 잠긴 채 형체를 지키고 있는 이 숲의 고사목처럼, 삶과 죽음이 한 몸에 공존하는 가미코치의 이중적 풍경은 전시 전반을 관통하는 은유로 작동한다. 방어와 경계의 기제로 작동하는 이 소리가 전시의 도입부에 배치된 것은 역설적이다. 이는 미지의 존재로부터 영역을 보호하려는 밀어냄의 제스처인 동시에, 관객을 그 경계 안으로 환대하며 전시의 시작을 알리는 일종의 '타격'으로 작동하기 때문이다. 이는 초대된 관객들의 감각을 터치하는 시작의 소리가 되어, 작가가 설정한 두 개의 방으로 이끄는 이정표가 되고 있다.

환대의 공간을 지나 마주하는 '할머니의 방'은 파편화된 상상을 추적하여 만들어진, 입으로 구현된 방 즉 '구전으로서의 장소'이다. 이곳에서 발화되는 이야기들이 사실에 부합하는지는 알 수 없다. 구전이 지니는 매체적 취약에도 불구하고, 작가는 오히려 그 불확실성을 리서치의 주된 동력으로 삼아 실재로 할머니의 이야기를 쫓아가는 여정을 파편적으로 펼쳐낸다. 할머니와 함께하는 얼음깨기 게임—깨뜨리고 다시 조립하는 것이 반복되는 순환 구조의 게임—영상 작업, 그리고 현실과 상상이 기묘하게 달라붙어 있는 사운드, 이미지, 오브제들은 진실의 여부를 떠나 그 자체로 하나의 독립된 실재를 형성한다. 이 방은 사실의 기록이 아니라, 믿음과 상상이 연결한 중의적 공간으로 은유되고 있다. 이와 대비를 이루는 '할아버지의 방'은 구체적인 서사적 정보가 소거된 채, 몇 가지 사물들이 덩그러니 배치되었다. 이 방에는 한켠에는 구옥의 천장 자재로—직접 제작한—보이는 네모난 나무 판재 하나가 자리하고 있으며, 관객은 자연스럽게 정보가 부재한 이 오래된 사물에 귀를 기울이도록 유도되고 있다. 흥미로운 지점은 침묵을 지킬 것만 같은 할아버지의 방에서 할머니 방의 사운드가 들려오고, 반대로 할머니의 방에서는 할아버지 방의 사운드가 울려 퍼진다는 사실이다. 오랜 세월 공간을 지탱하던 낡은 판재와 벽지를 매개로 두 공간의 청각적 교차가 일어나는 이 구조는, 유리된 듯 보이는 두 사람의 시간과 기억이 어떻게 서로를 침투하고 연동되는지를 보여준다. 이 벽은 무엇과 무엇을 나누는 경계의 벽이지만, 시각 외에 다른 감각으로 서로의 살아있음을 확인을 할수 있는 유대의 벽이기도 하다.

전시장에는 정면의 방들보다 물리적인 위치상 먼저 존재하지만, 관객의 시각적 인지와 동선의 흐름에 따라 차선으로 경험하게 되는 두 개의 방이 있다. 이들은 각각 '어두운 빛(어둠의 방)'과 '벗어날 수 없는 허공(가상의 방)'이라는 서로 다른 차원의 장소성을 드러낸다. 왼쪽에 위치한 '어둠의 방'은 물리적으로 만질 수 없는 것, 즉 '촉감으로서의 허공'을 제시한다. 이곳은 직접적인 촉감이 배제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역설적으로 빛과 두께, 그리고 보이지 않는 질감들이 묵직하게 부상하는 공간이다. 처음에는 단순한 굴곡으로만 인지되던 오브제는, 시간의 흐름에 따라 이동하는 빛의 궤적과 만나며 서서히 하나의 장면으로 응축된다. 표면 위를 스치는 빛은 오브제의 물성을 지우는 동시에 새로운 서사적 표피를 입히며, 관객의 눈앞에서 사물은 더 이상 고정된 형태가 아니라 언제든 변화할 수 있는 여지를 준다. 그러나 이 장면은 오래 지속되지 않는다. 빛의 각도가 다시 바뀌는 순간, 방금 전까지 선명했던 장면은 와해되어 이름 붙일 수 없는 감각, 즉 설명되지 않는 촉감의 상태로 되돌아간다. 이러한 순환적 변형—굴곡에서 장면으로, 장면에서 다시 미지의 촉감으로—은 기억이 형체를 갖추었다가 다시 흐려지는 과정과 닮아 있다. 어둠이 공간을 점유하는 방식, 드러나고 채워지는 것들의 궤도가 유장하게 흐르는 이 방은 허공이 단순한 빈 곳이 아니라 감각이 밀집된 질량임을 시사한다.

반면 오른쪽에 위치한 '가상의 방'은 상상과 관념, 구조와 장소로서 기능하는 '장소로서의 허공'이다. 이른바 백룸(Backroom)으로 명명되는 공간과 유사한 이 곳은 방향성과 인지를 상실하게 만드는 심리적 미로와도 같다. 백룸이 인터넷 상상력 속에서 익숙한 실내가 반복과 변주를 거듭하며 낯선 비장소(non-place)로 전락하는 것처럼, 이 방의 허공 역시 들어온 이들의 위치 인식에 질문을 던진다. 출구를 가늠할 수 없는 반복적 구조 속에서 관객은 자신이 서 있는 위치를 끊임없이 의심하게 되며, 이는 곧 기억이라는 관념적 공간이 지닌 속성—어디서 시작되었는지, 어디로 향하는지 가늠할 수 없이 스스로를 복제하며 확장되는 성질—과 겹쳐진다. 다만 이 방이 겨냥하는 것은 백룸 특유의 공포라기보다, 기억의 미로가 몸을 품어내는 온기 어린 포옹에 가깝다. 그러나 그 온기는 곧바로 보이지 않으며, 실재하는 사물과 장소의 감각을 교란하는 우회를 거쳐서야 비로소 실현된다. 두 방은 모두 보이지 않는 것을 드러내며 공간을 연결하지만, 하나는 기억의 궤도로서의 허공을, 다른 하나는 엉켜버린 불안으로서의 허공을 상반되게 보여준다.

김윤하 작가의 이번 전시 《이집의 주인은 누구요》는 기억을 둘러싼 이중성을 파고든다. 실재와 상상, 구전과 사물, 시각과 청각이 교차하는 이 공간은 관객에게 명확한 해답을 쥐여주지 않는다. 전시는 무엇이 진실이고 거짓인지 선언하는 대신, 타자의 기억이 우리의 감각과 어떻게 관계 맺고 전이되는지를 펼쳐 보인다. 이윽고 질문은 다시 전시의 제목이자 처음의 자리로 되돌아온다. "이 집의 주인은 누구요." 이 물음은 파편화된 구전의 화자인 할머니를 향한 것일 수도, 침묵 속에서 상대의 소리를 머금은 할아버지를 향한 것일 수도, 혹은 서로 다른 두 허공 속에서 방향을 잃은 채 기억의 무대에 선 관객 자신을 향한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이 문장은 결국 우리를 단절이 아닌 '이어짐'이라는 약속으로 이끈다. 누군가의 할머니와 할아버지의 이야기에서 출발한 이 사적인 공간이 수많은 익명의 관람객을 기꺼이 환대하며, '집'이라는 장소가 품은 의미를 새롭게 피워내기 때문이다. 물리적 거주지가 기억과 구전이라는 관념적 차원으로 확장되는 이곳에서, 관객은 불현듯 마주친 타인의 단서를 통해 가장 끈끈하고도 애틋한 결속의 집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